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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열왕기상 12:25-33
성경본문내용 25.그때에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에 세겜을 건축하고 그 안에 거하며 또 거기서 나아가 브느엘을 건축하고
26.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제 왕국이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주}의 집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그들의 주 유다 왕 곧 르호보암에게로 다시 돌아가 그들이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다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이것에 관하여 왕이 의논한 뒤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이 너무 큰일이로다. 오 이스라엘아,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을 보라, 하니라.
29.그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으므로
30.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들 중 하나 앞에서 경배하려고 단에까지 갔기 때문이더라.
31.그가 또 산당들의 집을 짓고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 곧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으며
32.또 여로보암이 유다에 있는 명절처럼 팔월 곧 그 달 십오일에 명절을 정하고 또 제단 위에 헌물을 드리니라. 또 그가 벧엘에서도 그와 같이 행하여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희생물을 드렸으며 또 자기가 만든 산당들의 제사장들을 벧엘에 두었더라.
33.이와 같이 그가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에 자기가 벧엘에 쌓은 제단 위에 헌물을 드렸으며 이스라엘 자을 위하여 명절을 정하고 제단 위에 헌물을 드리고 분향하니라.
강설날짜 2017-08-23

열왕기 저자는 신앙에 두 가지 길이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나는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그가 {}의 눈앞에서 악을 행하여 자기 아버지의 길과 자기 어머니의 길과 이스라엘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길로 걸었더라.”(열왕기상 22:52) 열왕기 저자는 여로보암의 길에 대해서는 강한 부정을 표합니다. 여로보암의 길을 따라 간 북이스라엘에서 한 명의 선한 왕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하나같이 우상을 숭배하고, 하나님 앞에 악하게 행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북이스라엘을 앗시리아를 통해 벌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우리가 여로보암의 길을 걸어가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여로보암의 길입니까? 오늘 이 시간에는 여로보암의 길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여로보암의 악한 신앙을 우리 삶에 반면교사로 삼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여로보암의 길

 

PART I 정하신 장소에서 제사하지 않음(v25-30)

왜 세겜과 브느엘을 건축했는가?

25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에 세겜을 건축하고 그 안에 거하며 또 거기서 나아가 브느엘을 건축하고여로보암은 에브라임 산에 세겜을 건축하였습니다.

 

건축하고는 요새화하였다는 의미입니다.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소도 세겜을 요새화했습니다. “브느엘은 얍복강 근처, 요르단 강을 건너 암몬 족속의 땅에 있었습니다. 여로보암이 폐허였던 브느엘을 재건축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브느엘은 동쪽의 암몬 족속들과의 외교적, 군사적 동맹의 통로를 확보하기 위함입니다. 여로보암은 남쪽의 르호보암과의 전쟁을 대비해서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외교적인 채널을 확보해 두었습니다. 여로보암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거는 신앙이 없었습니다. 자신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은 여로보암이 말씀을 따라 행하면 모든 것을 지켜 주실 것입니다. 르호보암의 위협에서도 구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보다 자신의 생각을 더 신뢰했음을 '세겜과 '브느엘'의 건축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제사와 신약 예배의 차이

26-27절을 보십시오.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이제 왕국이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의 집에서 희생물을 드리려고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그들의 주 유다 왕 곧 르호보암에게로 다시 돌아가 그들이 나를 죽이고 유다 왕 르호보암에게로 다시 돌아가리로다, 하고

 

신명기 16:16절에 보면, “네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장막절에 {}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에서 그분 앞에 보이되 {} 앞에 빈손으로 보이지 말고이스라엘 백성들은 일 년에 세 번 하나님께서 택하실 곳에서 제사를 드려야 했습니다. 구약의 하나님에 대한 제사는 장소와, 방법과 정해진 때에 지켜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예배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요한복음 4:24) 여기서 “spirit” 곧 성령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으로 인해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성령진리의 말씀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일 년에 세 번 다녀갈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다른 차이입니다.

 

신앙과 현실사이의 고민과 배교

여로보암은 아히야 선지자로부터 분명한 말씀을 받았습니다. 아히야 선지자는 여로보암에게 시각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옷을 열 두 조각으로 찢고, 열 조각을 여로보암에게 취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그에게 전하였습니다. “네가 만일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고 내 길들로 걸으며 내 눈앞에서 올바른 일을 행하여 내 종 다윗이 행한 것 같이 내 법규와 내 명령을 지키면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가 다윗을 위하여 행한 것 같이 너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우고 이스라엘을 네게 주리라.”(열왕기상 11:38)

 

여로보암이 이를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과 현실은 다릅니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지켜주신다고 하시는데, 당장 르호보암이 쳐들어오면 그의 나라는 망할 것 같습니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면, 백성들이 그에게서 등을 돌릴 것 같습니다. 여로보암 왕은 믿음 안에서 배짱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망하면 망하리라라는 배짱이 있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 자리에서 다시 세워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예루살렘에 가도, 그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이스라엘 열 부족을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못했습니다. 현실의 두려움에 굴복하였습니다.

 

여로보암과 같은 우리의 신앙

오늘 우리에게 이 여로보암의 갈등과 타협이 우리 안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여로보암이 아니라고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때를 따라 우리에게 두려워 하지 말라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라고경고해 주십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그리하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책임져 주시겠다고 강하게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들을 때는 우리 속에 믿음이 생깁니다. ‘그래 말씀을 붙들고 살아야지결단이 생깁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바라볼 때, 우리의 믿음은 작아집니다. 우리에게 자식들의 교육문제, 취업문제, 결혼문제, 은퇴 후의 생계 등, 여러 현실 문제를 바라볼 때, 자신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말씀이고, 내 현실은 현실입니다. 이 현실을 어찌하든지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헤쳐 나가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보다는 내 인간적인 노력을 더 신뢰합니다.

 

편리함을 추구하는 신앙

(1) 시간적, 경제적 편리함

28-30절을 보십시오.이것에 관하여 왕이 의논한 뒤 금송아지 둘을 만들고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일이 너무 큰일이로다. 오 이스라엘아,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을 보라, 하니라. 그가 하나는 벧엘에 두고 다른 하나는 단에 두었으므로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금송아지들 중 하나 앞에서 경배하려고 단에까지 갔기 때문이더라.”

 

여로보암은 금송아지 둘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두었습니다. 벧엘은 예루살렘 바로 위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단은 이스라엘은 북쪽의 아람, 지금의 시리아 경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그의 열 부족의 남쪽 경계와 북쪽 경계에 금송아지 만들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루살렘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여러 이유로 인해 서울에 갈 필요가 있습니다. 이럴 때, 아침 일찍 고속버스나 기차를 타야 합니다. 하루 안에 갔다 오기 위해서 준비를 철저히 하고 집을 나서야 합니다.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이 시기에도 먼 길을 나서기는 힘듭니다. 경제적으로도 많은 지출을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열 부족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일 년에 세 번 이런 일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이는 시간적으로, 경제적으로, 너무도 많은 희생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는 율법이 명하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하나님을 이렇게 힘들게 섬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이 아닌 단과 베델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여로보암은 백성들의 갈등하는 힘든 현실 문제를 공격하였습니다. 굳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필요가 없음으로 백성들을 설득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할 때, 늘 이런 편리함에 유혹 받을 때가 있습니다. “굳이 차를 타고, 한 시간이나 가서 예배를 볼 필요가 있는가?” “집 주위에 교회에 가면 되지 않는가?” 이런 유혹이 늘 때가 있습니다. 이런 생각이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른 교리, 바른 가르침을 가르치는 교회에 대한 고민이 빠져있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바른 말씀이 선포되고, 바른 가르침이 있는 교회에 가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를 선택하는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집 주위에 바른 교리, 바른 가르침이 있는 교회가 없다면 면 기꺼이 시간과 경제적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그런 교회를 찾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열 부족은 이런 신앙적 편리함을 선택했습니다. 단과 베델에서 드려지는 제사가 바른 제사인지, 거짓 된 제사인지에 대한 고민하지 않았습니다.

 

(2) 감정적 편리함

28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오 이스라엘아, 너희를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올라온 네 신들을 보라, 하니라.” 여로보암이 하나님 신앙에서 완전히 떠나 딴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닙니다. 그도 하나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예배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제사는 하나님 말씀 앞에 드려지는 제사입니다. 율법에 비취어 얼마나 자신이 벗어나 있음을 알고 애통하게 회개합니다. 이 회개의 표시로 짐승을 태워서 자신의 죄를 대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금송아지는 우리 죄에 대해 책망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욕망을 격려해주고 축복합니다. 하나님께 제사 드릴 때는 우리는 잠잠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금송아지 예배는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아론의 금송아지 경배처럼, 마음껏 소리 지르며, 노래하며, 자신의 감정을 금송아지를 분출합니다. 이스라엘의 열 부족은 자신이 만든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그들이 하고 싶은, 바라는 방식으로 제사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 건강과 부의 복음이 유행합니다. 교회에 와서 더 이상 죄에 대해 책망을 받기가 싫습니다. 설교자는 이런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해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더 이상 설교되지 않습니다. 건강해질 수 있는 방법, 부해질 수 방법,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방법들에 대한 설교가 대세입니다. 음악을 통해 우리의 감정을 쏟아내는 열린 예배에 젊은이들이 열광합니다. 향을 피워 놓고 경건한 분위기를 조성해서 영적체험을 강조하는 이멀징 예배가 서구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배는 말씀을 듣고 생각하고, 깨닫고, 회개하는 전통적인 예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하고 자 합니다. 이런 예배는 참으로 감정적으로 편리한 예배입니다. 내가 듣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하되, 죄에 대한 각성과 회개는 없는 예배입니다.

 

PART II 정하신 방법으로 제사하지 않음(v31)

31절을 보십시오. 그가 또 산당들의 집을 짓고 레위의 아들들이 아닌 자들 곧 백성 중에서 가장 천한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으며

 

산당’, 우상을 섬기던 장소

산당은 높은 곳에 세워진 공개 된 곳입니다. 이곳에 많은 제단들이 있었습니다. 이 제단들은 우상 숭배를 드려지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산당을 제거했다는 의미는 우상에게 바쳐지던 제단을 제거했다는 의미로 받아 들어질 수 있습니다. 영어 성경은 산당신사라고 번역합니다. 일본에 가면 수많은 우상을 섬기는 신사가 있습니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전범들에게 모시는 신사가 있습니다. 이런 우상들을 섬기는 곳에서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는 구별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레위 족속이 아닌, 제사장?

이런 우상 숭배의 자리에, 자격 없는 자들을 제사장으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첫째, 레위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둘째는, 그들은 천한 자들이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경외심이 없던 자들입니다. 이스라엘에는 우상숭배가 만연했습니다. 정상적인 제사장이라면 결코 북이스라엘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들은 올바른 신앙을 찾아 남쪽으로 다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여로보암은 자격 없는 자를 제사장으로 임명했습니다. 레위 족속는 하나님만을 전적으로 섬기기 위해 선택된 족속입니다. 어떻게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지에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마음의 자세로 두렵고 떨림으로 제사를 섬겨야 하는 지에 훈련 받은 족속입니다.

 

아무리 우리가 어느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있다고 해도, 절에서 하나님을 찬송할 수는 없습니다. 굿을 하는 곳에서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아주아주 특별한 이유가 아니면, 경건함을 확보할 수 있는 곳에서 예배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한 우리는 아무 자격 없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으로 믿고, 그 분의 말씀을 들을 때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믿을 수 있는 분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고, 바른 지식을 소유하고, 합당한 훈련을 거친 분을 우리는 믿고 그 분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하나님의 종에 대한 영적 권위입니다.

 

PART III 정하신 때에 제사하지 않음(v32-33)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32-33절을 보십시오. 또 여로보암이 유다에 있는 명절처럼 팔월 곧 그 달 십오일에 명절을 정하고 또 제단 위에 헌물을 드리니라. 또 그가 벧엘에서도 그와 같이 행하여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희생물을 드렸으며 또 자기가 만든 산당들의 제사장들을 벧엘에 두었더라.이와 같이 그가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정한 달 곧 팔월 십오일에 자기가 벧엘에 쌓은 제단 위에 헌물을 드렸으며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명절을 정하고 제단 위에 헌물을 드리고 분향하니라.”

 

여로보암은 팔월 곧 그 달 십오일에 명절을 정하였습니다. 이는 예루살렘에 모이는 기간보다 한 달이 늦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에다님 월 곧 일곱째 달의 명절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이때는 솔로몬 성전이 봉헌 된 날입니다. 여로보암은 의도적으로 한 달 늦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자기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결정하였습니다. 이는 자기 좋을 대로,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나님을 경배했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내가 섬기고 싶은 때에, 내 마음 대로의 방법으로 섬길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상에서 여로보암의 길이 무엇인지 살펴보았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과 무관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할 것을 자신에게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교만히 행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에게 희생물을 드렸으며 또 자기가 만든 산당들33절에 자기라는 단어가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자기가 만든 송아지들’, ‘자기가 만든 산당들’, 여로보암의 신앙은 자기중심적인 신앙입니다. 결코 하나님 중심적이지 않았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에 반대되는 길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길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 [하나님]의 책무를 지켜 그분의 길들로 걸으며 그분의 법규와 명령과 법도와 증언을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하는 모든 일에서 또 네가 어디로 향하든지 형통하리라.”(열왕기상 2:3)

 

여로보암의 길은 쉽습니다. 기분이 좋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굴레에 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사망의 길이요, 멸망의 길입니다. 사탄적인 길입니다. 다윗의 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길입니다. 내가 죽는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바른 길로 인도해줍니다. 온 교회가 여로보암의 인본주의 길이 아닌 다윗의 신본주의 길로 걸어나갈 수 있기를 주 안에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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