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사극을 통해 반란을 일으킨 자가 받는 형벌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왕께 반란을 일으킨 자는 자신뿐만 아니라 일가친척 모두가 멸족을 당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에 의해 무자비한 피의 보복이 뒤따릅니다. 우리는 최근에 터기 쿠데타 사건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권력을 지킨 자에 의한 광범위한 피의 숙청이 자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북한 김정은 정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물어 그 사람과 관련된 수많은 사람이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야 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의 집행하는 방법입니다. 그 과정에 자비란 일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이와 전혀 다른 정의의 집행과 자비에 대해 살펴볼 것입니다. 왕인 솔로몬이 어떻게 정의를 집행하고 자비를 베푸는 것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 사는 크리스천에게도 좋은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성경적 정의의 집행과 자비
Point I 추방과 정상 참작(v26~27)
솔로몬 왕이 아비아달에게 아나돗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아나돗은 예루살렘에서 50km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이곳은 제사장의 도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이곳은 예레미야의 출생지이기도 합니다. 솔로몬 왕은 그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더 이상 대제사장의 직분을 감당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솔로몬은 말합니다. “너는 마땅히 죽어야 하느니라.” 어떤 점에서 그는 죽어야 합니까? 그는 아도니야의 편에 서서 반란을 계획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편에 서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다윗의 후계자로 정하였습니다. 그는 다윗의 최측근입니다. 나단 선지자와 사독이 알고 있는 일을 그가 모를 리 없습니다. 아비아달은 솔로몬에게 반역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반역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마땅히 죽어야 마땅합니다.
반역에 가담한 자, 더욱이 단순 가담한 것이 아니라 주도적으로 가담한 자는 그가 누구라도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아비아달이 과거 그의 아버지 다윗에게 행한 일을 정상 참작하고 있습니다. 그는 과거 다윗 앞에서 하나님의 궤를 메었습니다. 솔로몬이 아비아달은 제사장의 직분을 잘 감당했음을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아버지가 당한 모든 고난에 아비아달이 함께 있었음을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이번에 너를 죽이지 아니하노라” 이 말의 의미는 용서가 아닙니다. 유예입니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주는 것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패자에게는 자비가 없습니다. 나의 권력에 도전한 자는 피로써 복수해서 다른 사람에게 본을 보이는 것이 인간 세상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지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그가 지난 세월 어떻게 했는지에 대해서도 인정하고, 정상을 참작해서 추방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성경은 하나의 사실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이처럼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쫓아내어 {주}의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것은 그가 {주}의 말씀 곧 그분께서 실로에 있던 엘리의 집에 관하여 이르신 말씀을 성취하려 함이었더라.” 하나님은 제사장 엘리의 두 아들의 죄를 물으셨습니다. 또한 두 아들을 제지하지 않는 엘리에게도 죄를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의 집을 영원히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사물엘상 3:13) 솔로몬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사장 아비아달을 추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추방의 결과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입니다.
Point II 사형과 마지막 배려(v28~35)
이제 솔로몬은 아도니야의 편에 섰던 군대 장관 요압에게 정의를 행사하고자 합니다. 이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요압은 제단의 뿔들을 잡았습니다. 억울하게 죄인으로 몰려 죽게 되었거나 실수로 사람을 죽인 사람은 제단의 뿔을 잡았습니다. 이는 도피성으로 피하여 목숨을 보전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명백한 살인자는 뿔을 잡더라도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요압은 무죄한 두 사람을 죽였습니다. “또한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과 이스라엘 군대의 두 대장 곧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너도 알거니와 그가 그들을 죽여서 평화로운 때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그 전쟁의 피를 자기 허리에 띤 띠와 자기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열왕기상 2:5) 율법에 의하면 살인자는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정의입니다.
30절을 보시시오. 요압이 제단에서 죽기를 간청합니다. 31절에 솔로몬 왕이 이를 승인합니다. 솔로몬은 요압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습니다. 요압은 살인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또한 그의 삼촌입니다. 그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요압의 청을 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은 요압이 자신에게 반란을 일으킨 죄를 물어 그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결코 개인적인 보복이 아닌 그가 무고한 자를 죽인 이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를 죽인 후에 그를 자기 집에 묻어 줄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결코 거리에 매달아 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는 사형을 당하는 자에게 베푸는 배려입니다. 반란자는 목을 메어 다시는 반란을 꾀하지 말라는 경고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입니다. 로마의 군인들이 반란군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길에 일렬로 세워 보는 이들로 하여금 공포감을 가지게 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정의입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또한 요압에 대한 배려를 잊지 않았습니다.
Point III 언약과 파기에 대한 책임(v36~46)
먼저 이 구절들을 이해하기 위해 시므이가 어떤 자인지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도망하고 있을 때에 바후림이라는 곳에 이르렀는데, 거기서 사울의 집 족속 하나가 나오니 게라의 아들이요 이름은 시므이가 다윗 왕과 그의 신복들을 향하여 저주하고 돌을 던졌습니다. 압살롬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도망했던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으로 다시 왕으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유다 족속과 함께 다윗 왕을 맞기 위해 급히 내려온 자가 있는데 바로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시므이였다. 그와 더불어 베냐민 사람 일천 명이 저와 함께하고 사울의 사환 시바도 그 아들 열 다섯과 종 스무 명으로 더불어 저와 함께하여 요단강을 밟고 건너 왕의 앞으로 나왔습니다. 다윗 왕은 이런 시므이의 목숨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용서와 왕권의 강화는 다른 이야기입니다. 시므이는 기회 주의자였습니다. 기회가 되면 자신에게 했던 것보다 더한 위해를 솔로몬 왕에게 가할 수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다윗 왕은 임종 시에 솔로몬에게 시므이의 처리를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를 바로 죽이지 않았습니다. 시므이와 언약을 맺었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너는 분명히 알지니 곧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내를 건너는 날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요, 네 피가 네 머리로 돌아가리라, 하매 ” 기도론 시내를 건너면 시므이의 옛 거주지인 바후림에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솔로몬 왕의 이 말의 의미는 예루살렘 밖을 떠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솔로몬이 시므이에게 베푼 자비입니다. 38절에 시므이는 솔로몬과 언약을 맺습니다. 언약은 약속과 다릅니다. 약속은 도의적인 책임이 있지만 언약은 어겼을 때 법적인 처벌이 뒤따릅니다. 시므이는 솔로몬과 한 언약을 어겼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시므이를 죽이는 것은 정당한 정의의 집행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정의의 집행과 자비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신명기 24:16 “자녀들로 인하여 아버지들을 죽이지 말며 아버지들로 인하여 자녀들을 죽이지 말라. 각 사람은 자기 죄로 인하여 죽을 것이니라.”
에스겔서 18:20 “죄를 짓는 혼, 그 혼은 죽을지니라. 아들이 아버지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며 아버지가 아들의 불법을 담당하지 아니하리니 의로운 자의 의가 그 위에 임하고 사악한 자의 악이 그 위에 임하리로다.”
성경은 죄를 범한 당사자의 죄를 묻되, 그 죄로 인해 다른 가족들에게 죄를 묻지 말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정의의 집행이며 또한 자비입니다. 연좌제를 물어 몇 대까지 피의 보복을 가하는 인간들의 행위와는 다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자는 성경적 정의의 실행과 자비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죄를 묻되 그 이상을 넘어서는 개인적 보복을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안에 있으면서도 이런 실수를 범할 때가 많습니다. 오늘 솔로몬의 왕으로서의 정의의 실행과 자비를 베푸는 모습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바른 정의의 집행과 자비를 동시에 베풀 줄 아는 자인지 돌아보기를 주 안에서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