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에게서 온 사랑만이 머문다
세상은 지나가고, 사랑은 머문다
우리는 지나가는 것을 붙들고 삽니다. 문제는 사랑의 방향입니다. 요한은 참 신자에게는 세 가지 표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가운데 두 번째, 사랑입니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닙니다. 요한에게 사랑은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사랑을 설명하면서 뜻밖의 질문을 먼저 던집니다. 이 사랑은 어디서 왔는가. 오늘 본문이 그 답을 보여줍니다.
이 사랑은 어디서 왔는가
요한은 이 계명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처음은 아주 오래전이 아닙니다. 이 공동체가 복음을 처음 들었던 그 날입니다. 그 날부터 이 사랑은 이미 그들 안에 있었습니다. 우리가 노력해서 만들어낸 것이 아닙니다. 착한 사람이라서 생겨난 것도 아닙니다. 복음이 왔을 때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입니다. 이 사랑의 출처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이 사랑은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런데 요한은 바로 다음 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동시에 이것은 새 계명이라고. 옛 것이면서 새 것이라니,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새롭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면 이 긴장이 풀립니다.
그리스어에서 "새롭다"를 뜻하는 단어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νέος(네오스)입니다. 시간적으로 새것, 방금 만들어진 것입니다. 새로 산 물건, 갓 태어난 것 — 그런 의미입니다. 그런데 요한이 여기서 쓴 단어는 이것이 아닙니다. καινός(카이노스)입니다. 이것은 질적으로 새것,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시간이 지나서 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종류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이 계명은 방금 생긴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되었습니다.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고, 그 사랑이 이제 신자 안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한 가지 더 있습니다. 이 사랑은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살아내야 할 명령이기도 합니다. 요한이 계명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쓰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받았다고 해서 저절로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받은 것을 매일 살아내는 것입니다. 은혜가 먼저이고, 순종이 그 뒤를 따릅니다.
이 사랑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하나님에게서 받은 사랑은 방향이 있습니다. 형제를 향해 흘러갑니다. 요한은 아주 단순하게 말합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안에 있고, 미워하는 자는 어둠 안에 있습니다. 그런데 미워하는 자에 대해 요한이 쓴 단어가 흥미롭습니다. "눈이 멀었다" — 그것도 현재 눈이 먼 것이 아닙니다. 이미 눈이 멀었고, 그 상태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미움은 한순간의 감정이 아닙니다. 오래 미워하다 보면 영적으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보는 눈 자체가 닫혀버립니다.
이것은 진단이기 이전에 초대입니다. 요한이 이 본문을 쓴 것은 정죄가 아닙니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확인하고, 사랑 쪽으로 방향을 돌리라는 초대입니다. 요한이 이 본문을 쓴 것은 그 방향으로 우리를 부르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왜 형제를 사랑하지 못하는가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왜 잘 되지 않습니까. 요한은 15절에서 그 뿌리를 드러냅니다. 내 사랑이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없습니다. 사랑은 한 자리에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습니다. 세상이 내 사랑을 차지하고 있으면, 형제를 향해 흘러갈 자리가 없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물질이나 자연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돌아가는 가치 체계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그 세상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세 가지로 보여줍니다. 육신의 정욕은 하나님 없이 자신을 채우려는 충동입니다. 먹는 것, 안전, 편안함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 없이 그것들로만 자신을 채우려 할 때 문제가 됩니다. 안목의 정욕은 보이는 것으로 자신을 자극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보기에 좋고 탐스럽다"고 느낀 그 구조와 같습니다. 남이 가진 것을 보고 나도 가져야 한다는 욕구, 비교에서 오는 갈망입니다. 눈이 먼저 움직이고 마음이 따라갑니다. 이생의 자랑은 내가 가진 것으로 나를 정의하려는 태도입니다. 내 지위, 내 성취, 내 소유로 "나는 이런 사람이다"를 확인받으려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자신을 세우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달라 보이지만 뿌리는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 자신을 놓는 것입니다. 그리고 요한은 17절에서 선언합니다. 이것들은 지나갑니다. 현재형입니다.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과 그 욕망은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머뭅니다. 지나가는 것을 사랑하면 함께 지나가고, 머무는 것을 사랑하면 함께 머뭅니다.
결론
참 신자의 두 번째 표지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우리 안에서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처음 들었던 그 날,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이 되었고, 지금 우리 안에서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는 매일 그것을 살아내고, 형제를 향해 흘려보내며, 세상을 향해 굽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지금 내 사랑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 그 질문을 붙들고 오늘 하루를 사십시오. 사랑이 머무는 곳에, 당신도 머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