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류의 죄 부인과 그 결과
들어가며
죄를 부인하는 사람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는 사람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이 보여주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의 언어를 사용합니다. 겉으로는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각 절의 결과를 통해 그 차이를 드러냅니다. 부인이 깊어질수록 그 사람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죄는 어디서 정의되는가
요한은 죄를 설명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빛이시요 그분 안에는 전혀 어둠이 없다."
이것이 출발점입니다.
죄는 행동 목록의 위반이 아닙니다. 빛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정의됩니다. 어둠 가운데 걷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그 죄를 부인하는 방식은 한 가지가 아닙니다.
첫 번째 사람: 고백과 삶 사이 — 1:6
"만일 우리가 그분과 교제한다고 말하며 어둠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 요한일서 1:6
첫 번째 사람은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합니다. 신앙 고백이 있습니다. 그런데 삶은 어둠 가운데 걷고 있습니다.
이 가정에 쓰인 "걷다"는 지금 이 순간 계속되고 있는 행위를 나타냅니다. 한 번의 실수가 아닙니다. 반복되는 삶의 패턴입니다. 교제한다고 늘 말하면서 어둠 가운데 늘 걷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문제는 악한 의도가 아닐 수 있습니다. 단지 고백과 삶 사이의 간격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나는 하나님과 교제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가면 어둠 가운데 걷습니다. 그것이 반복됩니다.
요한이 말하는 결과를 보십시오:
"우리가 거짓말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느니라"
요한은 이것을 거짓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진리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있습니다. 그러나 삶에서 실천되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 모릅니다. 삶이 비어가고 있다는 것을.
혹시 지금 당신도 그렇습니까? 고백은 있지만 그 고백이 삶을 이끌지 못하고 있습니까?
두 번째 사람: 본성을 지우는 자 — 1:8
두 번째 사람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요한일서 1:8
두 번째 사람은 한 단계 더 나아갑니다.
첫 번째 사람은 삶이 어긋나 있었지만 적어도 죄의 존재를 인식했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지금 나는 죄가 없다" 고 선언합니다. 죄 인식 자체가 사라진 것입니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육체의 행위는 영적 자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깨끗하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고대의 이단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나는 마음이 중요하지 행동은 별개다"라고 말하는 사람, "나는 근본적으로 선한 사람이다"라고 확신하는 사람 — 같은 구조입니다.
요한이 말하는 결과를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6절에서는 진리가 행해지지 않았습니다. 진리는 있었지만 실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진리가 내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천의 문제가 아닙니다. 진리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내면이 비어가고 있다는 것을.
세 번째 사람: 역사를 지우는 자 — 1:10
"만일 우리가 죄를 짓지 아니하였다고 말하면 우리가 그분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며 또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 요한일서 1:10
세 번째 사람은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갑니다.
8절의 사람은 "지금 나는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현재의 상태를 선언했습니다. 그런데 10절의 사람은 다릅니다.
이 가정에 쓰인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동사는 현재완료 형태입니다. 헬라어에서 현재완료는 과거에 그랬고 그 결과가 지금도 계속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세 번째 사람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과거에 단 한 번도 죄를 지은 적이 없으며 그 결과로 지금도 완전히 죄 없는 상태가 계속되고 있다."
8절이 지금의 상태를 부인했다면 10절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전체 역사를 부인합니다.
요한이 말하는 결과를 보십시오:
"우리가 그분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들며 또한 그분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6절에서 요한은 "거짓말한다" 고 했습니다. 자신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8절에서 요한은 "자신을 속인다" 고 했습니다. 자기기만입니다. 10절에서 요한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 고 합니다.
거짓말의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을 향하던 것이 이제 하나님을 향합니다. 자기기만이 신성모독으로 격상되었습니다.
그리고 결과도 가장 심각합니다. 헬라어로 λόγος αὐτοῦ (로고스 아우투) — 말씀 자체, 그리스도 자체가 속에 없다는 선언입니다.
세 사람 안에서 사라지는 것
부인이 깊어질수록 사라지는 것이 달라집니다.
첫 번째 사람 — 진리의 실천이 사라졌습니다. 진리는 있지만 삶에서 행해지지 않습니다. 고백과 삶이 분리되었습니다.
두 번째 사람 — 진리의 내면이 사라졌습니다. 삶만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내면에서 진리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세 번째 사람 — 그리스도 자체가 사라졌습니다. 삶도, 내면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자체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거짓말하는 분이 되었습니다.
삶에서 시작하여 내면으로, 내면에서 그리스도 자체로 향해 갑니다.
결론
요한이 이 세 절에서 보여주는 것은 죄 부인이 단순히 잘못된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서 무언가를 지워가는 행위입니다.
6절에서 요한은 거짓말한다고 했습니다. 8절에서는 자신을 속인다고 했습니다. 10절에서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고 했습니다. 부인이 깊어질수록 거짓말의 방향이 바뀝니다. 자신에서 하나님을 향해 갑니다.
그리고 사라지는 것도 달라집니다. 진리의 실천이 사라지고, 진리의 내면이 사라지고, 마침내 그리스도 자체가 사라집니다.
첫 번째 사람은 아직 모릅니다. 삶이 비어가고 있다는 것을. 두 번째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습니다. 내면이 비어가고 있다는 것을. 세 번째 사람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습니다. 그리스도조차 없어졌다는 것을.
그렇다면 요한은 이 자리에서 무엇을 말합니까? 행위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9절에서 단 하나를 말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
자백입니다. 부인의 반대는 더 나은 삶이 아닙니다. 자백입니다.
부인할수록 사라집니다. 그러나 자백하는 순간 —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용서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