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을 아는 자의 삶
들어가며
베드로는 3:1–10에서 주의 날의 확실성을 확립했습니다.
비웃는 자들은 말했습니다: "그분께서 오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그러나 베드로는 그들이 세 가지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음을 드러냈습니다. 역사를,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시간과 성품을.
그리고 이제 베드로는 질문을 바꿉니다.
"그런즉 이 모든 것이 해체될진대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겠느냐?" (v.11)
이것은 수사학적 질문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이 서신을 쓴 이유가 담긴 질문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두 가지 무기를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2장에서는 "자유" 를 팔았습니다. 은혜 아래 있으니 본성대로 살아도 된다고 방종을 허가했습니다. 3장에서는 "종말은 오지 않는다" 고 가르쳤습니다.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했습니다. 두려움도 없고 책임도 없으니 — 본성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말합니다:
주의 날을 아는 자는 이렇게 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날을 아는 자는 어떻게 삽니까? 베드로는 세 가지로 답합니다.
본론 1: 기다리라 — 거룩한 행실 속에서 (v.11–13)
"모든 거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서두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 (v.11–13)
기다림의 방식
베드로는 단순히 "기다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기다리는지를 말합니다.
"모든 거룩한 행실 속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가운데"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행실 속에서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베드로는 놀라운 표현을 사용합니다:
"기다리고 서두르라"
기다린다는 것과 서두른다는 것은 언뜻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하는 기다림은 멈춤이 아닙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자는 이미 그 날을 향해 살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은 종말이 오지 않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심판의 두려움을 제거했습니다. 두려움도 없고 책임도 없으니 — 본성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정반대로 말합니다.
종말은 방종의 면허가 아닙니다. 성화의 동기입니다.
기다림의 방향
"의가 거하는 새 하늘들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 (v.13)
그 날을 아는 자는 지금 이 세상에 매이지 않습니다. 해체될 것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향해 살아갑니다.
거짓 교사들은 본성대로, 욕망대로, 세상이 주는 것을 따라 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아는 자는 압니다. 이 모든 것은 해체됩니다. 지금 내가 붙들어야 할 것은 세상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의가 거하는 그 날을 향한 삶입니다.
본론 2: 힘쓰라 —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그분께 발견되기를 (v.14–16)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러한 것들을 기다리나니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화평 중에 그분께 발견되기를 힘쓰라" (v.14)
"힘쓰라" — σπουδάζω
베드로가 사용한 σπουδάζω 는 단순한 노력이 아닙니다. 신속하게, 전력을 다해, 긴박하게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성경에서 믿음과 직접 연결되어 사용됩니다. 힘씀은 인간의 의지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에서 나오는 헌신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말했습니다: "자유롭게 살아도 됩니다." 그것은 느슨함이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말합니다: 신속하게, 전력을 다해, 믿음으로 힘쓰라.
왜 신속해야 합니까? 주의 날이 도둑같이 오기 때문입니다. 예고 없이 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향해 힘씁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이것은 구약 제사의 언어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반드시 점도 없고 흠도 없어야 했습니다 (레 22:17–25). 흠 있는 제물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우리의 삶 자체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같은 이미지를 사용했습니다: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롬 12:1)
그분 앞에 서게 될 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발견되겠습니까?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제물로 발견되기를 — 그것을 향해 믿음으로, 신속하게 힘써야 합니다.
화평 중에
ἐν εἰρήνῃ — 화평 중에.
에베소서 4:3에서 바울은 같은 단어 σπουδάζω 를 사용하며 말했습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화평은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신속하게, 전력을 다해 힘써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화평은 두 방향을 동시에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이 먼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화평의 상태에서 그분께 발견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공동체 안에서의 화평으로 흘러나옵니다. 거짓 교사들로 인해 분열된 공동체 안에서 화평을 만드는 것입니다.
오래 참으심이 구원입니다 (v.15)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인 줄로 여기라"
주의 날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의 시간입니다. 힘쓸 수 있는 시간입니다. 점과 흠을 제거할 수 있는 시간입니다. 화평을 만들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을 방종으로 채우는 것과 힘씀으로 채우는 것 — 그 차이가 바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와 그 날을 아는 자의 차이입니다.
바울의 증거 (v.15–16)
베드로는 바울을 끌어들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자기가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이것은 단순한 인용이 아닙니다. 사도적 권위의 확인입니다.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도 같은 방향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바울의 서신 안에서 깨닫기 어려운 것들을 왜곡했습니다.
"배우지 못하여 불안정한 자들이 다른 성경 기록들과 같이 그것들도 왜곡하다가 스스로 파멸에 이르느니라"
거짓 교사들이 판 "자유"는 바울의 가르침을 왜곡한 것이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자유, 로마서의 은혜 — 그 언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방향을 완전히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왜곡의 끝은 파멸입니다.
본론 3: 자라라 — 은혜와 앎 안에서 (v.17–18)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들을 미리 알았은즉 저 사악한 자의 오류에 이끌려 너희도 너희 자신의 굳건함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오직 은혜 안에서 자라고 우리 [주] 곧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라" (v.17–18)
"미리 알았은즉"
베드로는 다시 한번 앎을 강조합니다.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이 어떻게 왜곡하는지, 주의 날이 어떻게 오는지, 그 날을 아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 사악한 자의 오류" 는 지금도 실재합니다. 자유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방종, 바울의 서신을 왜곡한 가르침, 주의 날을 비웃는 논리 — 그것은 굳건함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오류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말합니다: 떨어지지 않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자라야 합니다.
두 가지 성장의 축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
이 자람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입니다. 내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알면서도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용서가 나에게 흘러옵니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것을 받아들이는 성장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서 자라는 것
이 자람은 내가 그리스도를 향해 입니다. 단순한 정보가 아닙니다. 함께 살면서, 고난을 통해, 말씀 안에서 그분을 능동적으로 알아가는 것입니다. 그 앎이 깊어질수록 거짓 교사들의 왜곡을 분별하는 힘이 생깁니다. 그 앎이 깊어질수록 주의 날을 향한 삶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이 두 방향이 함께 작동할 때 성화는 완성됩니다.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는 것 — 이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자라는 삶입니다.
떨어지지 않는 것은 방어입니다. 그러나 자라는 것은 전진입니다. 베드로는 방어로 끝내지 않습니다. 전진으로 끝냅니다.
결론
베드로는 이 서신을 송영으로 마칩니다: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v.18)
이것은 단순한 마무리가 아닙니다. 그 날을 아는 자의 삶의 방향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의 정욕을 향해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아는 자는 그분의 영광을 향해 삽니다. 이제와 영원토록.
베드로가 이 서신 전체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 여기서 완성됩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유를 팔고 종말을 부정했습니다. 두려움도 없고 책임도 없으니 본성대로 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날을 아는 자는 다릅니다.
기다립니다 — 거룩한 행실 속에서. 힘씁니다 — 점도 없고 흠도 없이 그분께 발견되기를. 자랍니다 —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으면서, 그리스도를 향해 능동적으로 나아가면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의 끝은 하나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이제와 영원토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