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능력과 보배로운 약속, 하나님의 본성을 향하여"
베드로는 3-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를 부르사 영광과 덕에 이르게 하신 분을 아는 것을 통해 그분의 신성한 권능이 생명과 하나님의 성품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그것들로 말미암아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이 우리에게 주어졌나니 이것은 너희가 이 약속들을 힘입어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두 절 안에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들어 있습니다. 출발이 어디인가. 무엇이 우리를 이끄는가. 무엇에서 벗어나는가. 그리고 어디에 이르는가.
신성한 권능 — 기초가 이미 놓였다
헬라어 테이아스 뒤나메오스. 하나님께 속한 능력입니다. 이 권능이 하는 일이 3절에 나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도다."
생명은 구원입니다. 죄와 사망에서 건져내시는 것입니다. 경건은 그 구원이 삶 안에서 작동하는 것입니다. 시작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 구원이 실제 삶이 되는 것까지 주셨습니다.
보배로운 약속들 — 더 크고 실재하는 것
기초가 놓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본성은 에피튀미아, 강렬한 욕망으로 작동합니다. 그 욕망은 눈에 보이는 것, 지금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을 향해 기웁니다. 더 갖고 싶고, 더 인정받고 싶고, 지금 이 순간의 만족을 원합니다. 이것이 프토라, 썩을 것을 향해 흐르는 우리의 기본 방향입니다.
베드로는 이 욕망을 억누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방향을 바꾸라고 말합니다. 그 방향을 바꾸는 것이 바로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들은 무엇인가. 베드로는 이 편지 전체에서 그 윤곽을 그립니다.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3:13). 썩지 않는 몸으로 그리스도와 얼굴을 맞대는 그날입니다. 이것이 베드로가 말하는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입니다.
썩을 것을 피하여 — 자연스러운 이탈
"정욕으로 인해 세상에 있게 된 썩을 것을 피하여." 헬라어 아포퓨곤테스, 이미 탈출한 자로서입니다. 억누름이 아닙니다. 강제가 아닙니다. 더 크고 더 실재하는 약속을 붙잡은 사람은 지금의 인정이 전부가 아님을 압니다. 욕망이 억제되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것을 향해 흐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썩을 것에서 멀어지는 방식입니다.
진흙탕에서 노는 아이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 아이는 진흙탕이 좋습니다. 더 좋은 것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닷가를 한 번 경험한 아이는 다시 진흙탕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더 크고 더 실재하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약속이 하는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것을 보여줌으로써 정욕의 매력을 상대적으로 작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 — 종착역
썩을 것에서 멀어지는 움직임의 끝이 4절의 목적지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잠깐 멈추어야 합니다.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의 본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1:5-7에서 그 본성의 구체적인 모습을 나열합니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 이것들이 하나님의 본성이 우리 안에서 드러나는 방식입니다. 지금 시작되었지만 그날에 완성됩니다.
그리고 이 종착역으로 이끄는 것은 우리의 의지가 아닙니다. 신성한 권능과 보배로운 약속들입니다. 권능은 기초를 놓았고, 약속은 방향을 잡습니다. 권능이 없으면 시작할 수 없고, 약속이 없으면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 둘 모두 우리 밖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이르는 것은 우리가 스스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어진 권능 위에 서서, 약속을 붙잡고 이끌려 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묻는 질문
나를 목적지로 이끄는 것은 나의 의지인가, 아니면 그분의 권능과 약속인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