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의 빛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가
"복음을 전혀 들어본 적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본성의 빛을 따라, 또는 자신들이 믿는 종교의 법을 따라
아무리 열심히 산다 하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이 문답을 처음 읽는 사람은 한 가지 감정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억울함입니다. 복음이 이 땅에 오기 전에 태어난 수많은 사람들 — 이순신 장군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평생 선하게 살려 했던 사람, 하늘을 경외하며 살았던 사람들 — 그들이 단지 복음을 듣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원에서 제외된다면, 그것이 과연 공의로운가. 이 질문은 신학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의 심장에서 나오는 질문입니다. 그 무게를 먼저 인정하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것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감정이 정당하다고 해서, 그것이 신학적 판단의 기준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감정은 질문을 만들지만, 답은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합니다.
첫째
본성의 빛이란 무엇인가
본성의 빛이란 하나님이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주신 인식 능력입니다. 세 가지 채널로 작동합니다.
첫째는 자연 계시입니다.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을 감지하는 것입니다(롬 1:19-20).
둘째는 이성입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추론 능력입니다. 셋째는 양심입니다.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에게도 마음에 새겨진 도덕 감각입니다(롬 2:14-15).
제60문이 "본성의 빛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 빛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빛이 하나님을 알기에 충분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그 빛마저 억압하고 왜곡한다는 것입니다(롬 1:21-23). 본성의 빛은 인간을 하나님 앞에 세우지만, 그 앞에 서기에 합당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둘째
그렇다면 복음을 듣지 못한 자는 모두 지옥에 가는가
성경이 제시한 원리는 분명합니다.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행 4:12). 이것은 협소한 배타성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이 하나라는 선언입니다. 그런데 바로 여기서 많은 사람이 멈춥니다. "그렇다면 이순신 장군은 지옥에 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잠시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역사적 인물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복음이 오기 전 이 땅에서 살다 간 수천 년의 사람들, 우리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들,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살다 간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질문입니다. 그 무게를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이 깊을수록, 우리는 더욱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원리의 불확정과 범위의 불확정은 다릅니다.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구원을 어떻게 적용하시는지, 그 방식과 경계를 우리가 최종적으로 획정할 수 없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이 그 단서를 줍니다. 아브라함, 다윗,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사람들 —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명시적으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의 대상은 동일한 그리스도였습니다. 약속된 메시아를 향한 믿음으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근거는 분명합니다. 언제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구원을 어떻게 펼치시는지, 그 모든 방식을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 원리가 흔들린다는 뜻이 아닙니다. 길은 하나이고, 그 길을 통해 누구에게 은혜가 미쳤는지의 판단은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칼빈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도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자에 대해 단호한 저주를 선언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음 이외의 방법으로 구원이 가능하다고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신학이 이 질문 앞에서 취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한 자리입니다.
셋째
로마서는 양심으로 구원받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로마서 2:14-15를 근거로 "양심대로 살면 구원받는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울의 논증을 반대 방향으로 읽는 것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양심이 구원의 통로임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양심이 있기 때문에 이방인도 하나님 앞에 변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양심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심판의 근거로 제시됩니다.
로마서 전체의 흐름은 이 방향입니다. 유대인도, 이방인도, 모두 죄 아래 있으며(롬 3:9-23), 따라서 모두에게 복음이 필요합니다. 양심은 인간이 하나님의 법을 전혀 모른다고 말할 수 없게 만들지만, 그 법을 지키기에 충분한 능력을 주지는 않습니다. 본성의 빛은 인간의 책임을 확인하지, 인간의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히려 복음이 왜 필요한지를 더 분명히 보여줍니다. 양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면, 외부에서 오는 다른 길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결론
복음을 듣지 못한 채 살다 간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은 정당합니다. 그 감정을 억누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타까움의 끝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본성의 빛은 불충분하고, 복음은 유일한 길입니다. 그리고 개별 사례의 최종 판단은 공의로우시고 선하신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도 반드시 옳게 판단하십니다. 그 신뢰 위에 우리가 서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복음을 듣지 못한 자가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을 향한 고발이 아닙니다. 복음을 가진 우리를 향한 질문입니다.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그 복음을 가지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