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말씀
우리는 1장을 두 강에 걸쳐 공부했습니다. 1강에서는 갈라디아서 서론으로서 갈라디아 교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교인들이 침투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믿음으로는 구원에 대해 충분하지 않다고 했습니다. 플러스 알파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믿음 + 유대교의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에 사도 바울은 그런 가르침은 다른 복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어서 그는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간증하였습니다. 그는 유대교에 열심히 있던 자였습니다.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현장에도 그가 있었습니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에 가서 성도들을 붙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핍박했던 사도들에게 악수를 청하고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 밖에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과거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의 도를 사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오늘 말씀
오늘 말씀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단 한 시간도 굴복하지 아니하였으니 이것은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게 하려 함이라.”(갈라디아서 5:2) 사도 바울은 이방 신자들을 위해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오늘 이 시간 갈라디아서 2장을 통해 바울이 싸운 복음의 진리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복음의 진리
예루살렘의 거짓 교사들(v1-10)
“그 뒤 십사 년이 지나서”
우리는 이 십사 년 뒤가 정확히 어떤 때인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 광야로 간 때부터인지, 아니면 그가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만난 때부터인지를 명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내가 계시로 말미암아 올라가”
바울과 바나바는 계시를 따라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때를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 공회와 연결시킵니다. 바나바와 동행을 하였고,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는 문제와 주제가 같습니다. 또한 베드로와 야고보가 언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주장을 펼치는 학자들은 사도행전 11장의 연보를 위해서라고 주장을 합니다.
거짓 교사들의 특징
1.알지 못하는 사이에”
거짓 교사들은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예루살렘 교회에 침투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들어갔음을 암시해줍니다. 이 시기에도 많은 이단들이 정통인 신학교에 자신들의 사람들을 보냈습니다. 정통인 신학교를 졸업했기에 사람들이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정체는 이단입니다.
2. 거짓 형제들”
알지 못하는 사이에 들어온 자들은 거짓을 가르칩니다. 참 된 것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들
3. “엿보아”
이 단어는 “spy out”라고 영어로 번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파이가 어떤 활동을 벌이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다른 사람들을 포섬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이 이런 활동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4. “몰래 들어왔으나”
이단의 특징은 몰래 들어옵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몰래 들어오는 것 자체가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입증해 줍니다.
5. “무엇이나 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이 사람들”
이들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나름대로 어떤 발언권을 가질 위치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려고 했던 같습니다. 교회는 이런 자들의 정체를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들을 교회의 일에 발언권을 가지는 위치에 있을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6. “그들이 회의에서 내게 아무것도 더해 주지 아니하였느니라.”
이들과 바울의 싸움은 힘겨운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을 이방인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반대했습니다. 특별히 “할례”를 행하여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바울이 주장한 복음의 진리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그토록 거짓 형제들과 힘겨운 싸움을 벌이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던 교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이방인 디도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유대교인들이 당연히 그들의 전통 가운데 할례를 행하면 됩니다. 그것이 그들의 구원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지킬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것으로 충분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아무 효력이 없으되 오직 사랑으로 활동하는 믿음뿐이니라.”(갈라디아서 5:6) 오직 은혜로 구원받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을 더하려는 것은 이단입니다. 결코 우리의 공로가 구원에 아무런 필요가 없습니다. 할례를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은혜로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v11-14)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인들이 안디옥 교회에 도착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베드로가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습니다. “위선”이라는 단어는 자신의 본래의 마음을 숨기고 행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구하고, 자리를 떴습니다. 바나바는 자신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이 복음의 진리에 반하는 것임을 알면서도 베드로를 따라 행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고넬료의 집을 방문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유대인이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과 교제하거나 그에게 가까이 가는 것이 율법에 어긋나는 줄은 너희가 아느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가 어떤 사람을 속되다고 하거나 부정하다고 하지 말 것을 내게 보이셨느니라.”(사도행전 10:28)
이에 사도바울이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이는 감정적인 책망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근본 진리를 지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아니하는 것을 내가 보고 그들 모두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방인들의 방식대로 살고 유대인들처럼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 이방인들을 강요하여 유대인들처럼 살게 하느냐? 하였노라.”(갈라디아서 2:14)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이유는 그가 복음의 진리에 따라 바르게 걷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베드로의 행위가 용납된다면 이방인과 유대인들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는 복음이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던 안 지키던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두 다 은혜로 구원받은 한 형제자매입니다.
복음의 진리에 대한 바울의 선언(v15-21)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되는 줄 알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6)
“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의롭게 되고자 함이라”
“의롭게” 된다는 의미는 영어로 “justification”입니다. 이는 법정 용어로서, 무죄라는 선포입니다. 재판관이 그렇게 선포했다면 그 사실은 법적으로 무죄입니다. 하늘 법정에서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행한 일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율법의 요구를 모두 행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율법의 의를 다 충족시킬 사람은 없습니다.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일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둘째는, 아담의 죄로 인한 우리의 죄책을 면하여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의를 다 이루심으로 이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셨습니다. 아담의 죄로 인한 죄의 유전으로 인해 우리가 죽어야했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칭함을 받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자 하다가 우리 자신 또한 죄인으로 드러난다면 그리스도께서 그런 까닭으로 죄의 사역자가 되시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라디아서 2:1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없음에도 불구하고 죄인으로 판명된다면 이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반의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갈라디아서 2:19)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다시는 율법을 통해 구원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행위를 통해 구원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구원의 방법,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사실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라디아서 2:20)
이 말의 그리스어 문법은 수동태입니다. 또한 과거의 사실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치는 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그리스어 문법적으로 해석하면 “과거에 저는 십자가에 못 박힘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과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행위가 아닌 은혜로 구원을 받고 지금 현재도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라디아서 2:21)
만일 율법으로 인간이 될 수 있다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 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율법의 의를 다 행하셔야 했습니다.
이상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리입니다. 다시 한 번 복음의 진리를 정리하겠습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 위에 다른 것을 더해서는 안 됩니다. 은혜로 구원받는 진리는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해서 구원 받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구원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입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
구원에는 세 가지 구원이 있습니다. 한 프리즘 안에 다양한 색깔이 있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구원의 첫 단계는 “justification”입니다. 이는 우리의 공로를 필요치 않습니다. 은혜로 선언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켜 주셔서 그의를 보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sanctification”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여겨짐을 당해서 구원을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제 구원의 여정을 걸어가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의 책임이 요구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신약에서 “해라”, “하지 말라”한 명령도 율법입니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구원 받은 자로서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함입니다. 율법의 제사적인 내용이 아닌, 시민법, 즉 백성들의 삶을 지켜주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십계명은 우리가 깊은 이해를 가지고 지켜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일에 게으르다면 우리는 “도덕률 폐기론자”들이 될 것입니다. 이 땅에서 구원 받아서, 천국행 티켓을 마련했으니, 이제부터는 마음껏 죄를 지어도 된다는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glorification”입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는 죄도 없는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는 미래의 일입니다.
오늘 바울이 이야기하고 있는 구원은 “justification”의 구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원은 은혜입니다. 결코 인간의 어떤 공로로 이루어지지는 것이 아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