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상 1:1~53, 2:13~25
오늘부터 열왕기상을 공부하겠습니다. 먼저 열왕기에 관한 배경적인 지식들에 대해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원래 열왕기상하는 한 권의 책이었습니다. 열왕기상하가 분리된 것은 역사적, 신학적 이유가 아닌 인쇄상의 이유였습니다. 구약은 히브리로 기록되어 있지만, 분량을 줄이기 위해 모음을 생략했습니다. 17세기 인쇄 기술이 발전하였습니다. 또한 히브리어 모음을 넣은 히브리어 성경을 인쇄하고자 할 때, 분량이 너무 커지는 문제가 대두 되었습니다. 열왕기상하의 저자는 누구이지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에스라 또는 예레미야 설이 있지만 확신한 것은 아닙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없는 이방 민족에게 영적인 빛을 비추어야 할 의무가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군사적인, 경제적인 강대국이 아니라 영적인 삶이 어떠한 지를 나타내 보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런 영적인 의무에서 실패하였습니다. 영왕기상하는 이스라엘이 다른 이방 국가들에 대해 영적인 삶의 증인이 되지 못함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시대 교회가 이 의무를 감당해야 함을 촉구하고 있는 책이기도 합니다.
열왕기상하와 같은 역사서를 읽을 때, 해석의 초점은 인물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당시의 그들의 생활양식은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릅니다. 그들은 우리 삶의 거울이 되어 우리의 내면을 비추어 보여 줄 것입니다. 열왕기상하에는 많은 왕들이 등장합니다. 좋은 왕도 등장하고, 나쁜 왕도 등장합니다.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의 하나님 앞에서의 삶과 믿음은 이 시대 동일하게 우리의 삶에 적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그 처음 시간으로 아도니야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우리가 아도니야를 통해 배우게 될 점은 그가 스스로를 놓여 왕이 되려고 했던 자라는 점입니다. 성경은 “그를 스스로를 높인 자“로 낙인을 찍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어떤 점에서 스스로를 높인 것일까요? 오늘 말씀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높인 자의 삶의 특징이 무엇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저의 말씀의 제목은
스스로를 높이는 자
PART I 인간적인 조건들을 신뢰하는 자(v1~53)
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나이 들어 늙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이제 70살이었습니다.(사무엘하5:4~5) 또한 그는 병이 들었습니다. 아마도 피의 순환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불을 덮어 주어도 그의 몸은 따뜻해지지 않았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신하들이 다윗의 몸을 따뜻하게 데우기 위해 아리따운 처녀를 찾았는데, 그녀는 수넴에 사는 아비삭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아비삭은 다윗은 간호하였고, 다윗의 품에서 잤지만, 다윗은 그녀와 성적인 관계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볼 때, 아비삭은 단순한 간호만 하는 여인이기 보다는 다윗의 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열왕기상 저자는 왜 아비삭이라는 여인을 소개하고 있을까요? 이 여인이 아도니야의 죽음에 원인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부분은 다음에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5절에 보면 아도니야가 스스로를 높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왜 그가 스스로를 높였을까요? 그에게는 스스로를 높일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그는 스스로를 높일만한 인간적인 조건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서열상으로 왕위를 계승할 합법적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의 형들인 암논과 압살롬은 이미 불행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셋째였던 길르압도 죽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넷째로서 당연히 왕의 계승에 가장 근접한 자였습니다. 그는 용모가 아름다웠습니다. 사람이 용모가 잘 생기고 풍모가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호감을 가질 수 있는 좋은 장점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의 아버지 다윗은 그에게 섭섭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떠한 일에도 그를 용납해 주었습니다. 아마 다윗은 그의 아들들이 불행하게 죽는 것을 보면서 넷째였던 아도니야를 애지중지 키웠던 것 같습니다. 아도니야는 다윗 왕이 자신을 두둔해 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둘째, 그는 스스로를 높임만한 군사적인 준비를 하였습니다. 그는 그의 형 압살롬처럼 주도면밀한 면이 있었습니다. 그는 전차들과 기병대, 그리고 보병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를 높일 수 있는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 그는 스스로를 높일만한 인재들이 가까이 있었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요압은 당시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다윗을 도와 전장을 누빈 백전노장이었습니다. 또한 제사장 아비아달은 다윗 시대의 두 명의 대제사장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군사적인 거물이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중책을 맡은 자가 있었습니다. 만약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이들은 즉각적으로 왕위의 안정을 돕는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솔로몬을 제외한 다른 왕자들과 다윗 왕의 신하들이 다 아도니야가 베푼 잔치에 참석했습니다. 이는 그들이 아도니야를 지지한다는 공개 선언을 한 것입니다.
대세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게임은 끝이 난 것처럼 보였습니다. 아도니야가 왕위에 오르는 수순만이 남아 보입니다. 그러나 아도니야가 생각지 못한 것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스스로를 높인다고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인간적인 조건들과 상황들이 호의적일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시면 왕이 될 수가 없습니다. 아도니야가 하나님 앞에서 바른 믿음을 가졌다면 하나님 앞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다윗의 목숨이 경각에 있다고 해서 결코 조급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그럴수록 차분히 앉아 하나님의 행하심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아도니야는 그가 가진 조건들과 상황들을 신뢰하였습니다. 결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자가 스스로를 높이는 자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아도니야와 같은 실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세울 때 인간적인 조건들, 합리적인 생각, 상황 논리에 기초해 세우려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기도하고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심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코 교회의 직분은 영적인 자리입니다. 세상에서 세상을 세울 때의 기준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지 않고, 조건들과 상황을 바라보며 합리적인 생각에 기초해 일할 때, 우리는 스스로를 높이는 실수에 빠질 수 있습니다.
11~53절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바세바에게 개인적으로 솔로몬이 왕이 될 것을 하나님 앞에 맹세하였던 것 같습니다. 다윗을 이어 누가 왕이 될 것인가는 하나님이 결정할 문제였습니다. 다윗이 사사로이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솔로몬이 왕에 오르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였습니다. 온 백성이 솔로몬 왕의 계승을 축하해 주었습니다. 동시에 아도니야를 지지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흩어졌습니다.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이 솔로몬을 도왔다는 증거가 됩니다. 백성의 마음이 솔로몬을 향한 것은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신 좋은 증거가 됩니다. 아도니야는 스스로를 높였지만 솔로몬은 하나님께서 높이셨습니다.
PART II 자신의 계략을 신뢰하는 자(2:13~25)
2:13절을 보십시오. 학깃의 아도니야가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왔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그가 이르되, 당신도 아시거니와 왕국은 내 것이었고 온 이스라엘은 나를 향해 얼굴을 들고 내가 통치하게 하려 하였으나 왕국이 돌이켜져서 내 동생의 것이 되었으니 이는 그것이 {주}에게서 나와 그의 것이 되었기 때문이니이다.” 아도니야는 이 왕국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였습니다. 그러나 일이 틀어진 것은 하나님의 개입하심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보면 아도니야가 바른 상황 인식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아도니야가 이 일이 주께로부터 나왔다는 바른 믿음을 가졌다면 그는 겸손해져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두 번째로 왕위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계략을 믿고 재기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는 그가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지 않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면 아도니야의 계략은 무엇입니까? 수넴 여인 아비삭을 자신에게 달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밧세바는 그의 요구를 받아들여 그의 아들 솔로몬에게 아도니야를 대신하여 아비삭을 아도니야에게 아내로 줄 것을 요청합니다. 이 대목에서 두 사람의 잔머리 대결이 흥미롭습니다. 아비삭은 단순히 다윗 왕의 수종 들던 여인이 아니라 다윗의 후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의 아버지의 후궁을 취하는 것은 왕위를 취하였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었습니다. 압살롬를 피해 남겨진 열 후궁들은 대낮에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압살롬은 그들을 취하였습니다. 이는 이제 그가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백성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도니야는 아비삭을 통해 재기를 꿈꾸고 있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에 오른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밧세바의 요구를 들은 솔로몬 왕의 반응이 무엇입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솔로몬 왕이 자기 어머니에게 응답하여 이르되, 어찌 어머니께서 아도니야를 위해 수넴 여인 아비삭을 구하시나이까? 그는 내 형이오니 그를 위해 왕국도 구하옵소서. 심지어 그를 위해 구할 뿐 아니라 제사장 아비아달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을 위해서도 구하옵소서, 하고” 이 구절을 볼 때, 다윗 왕은 아도니야의 계략을 단번에 알아챈 것 같습니다. 솔로몬은 더 이상 아도니야를 살려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다시 왕위를 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정적인 그의 형을 죽임으로 그의 왕위를 안정시켰습니다. 23절을 보십시오. “그때에 솔로몬 왕이 {주}를 두고 맹세하여 이르되, 만일 아도니야가 이 말을 하고도 자기 생명을 잃지 아니한다면 [하나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왜 솔로몬이 이런 말을 하는 것입니까? 아도니야의 행위는 자신에게 대한 도전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왕권이 하나님께로 온 것이라면, 그 어떤 사람도 이에 대해 더 이상 도전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됩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교회는 정치판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권모술수가 판치며, 암투가 있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정말 순종해서 일하는 지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사람의 계략을 하나님께서 파하십니다. 자신이 머리를 쓴다면 다른 사람도 머리를 쓸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을 믿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 미련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다면 가만히 있어야 합니다. 힘들지만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으로 하나님의 뜻을 뒤집으려고 할 때, 더 큰 재앙을 경험함을 아도니야를 통해서 배우게 됩니다.
오늘은 스스로를 높인 아도니야를 통해 하나님 앞에 사는 자의 삶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도니야를 스스로를 높인 자였습니다. 자신이 가진 인간적인 조건들과 배경들을 신뢰하여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일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았지만 결코 자신의 야심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열왕기상은 이런 아도니야를 “스스로를 높인 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높인 아도니야”를 통해 하나님이 사람이 높이심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대적자의 음모를 파하시는 지를 배웠습니다. 이런 영적인 가르침이 몸 된 교회를 섬기에 큰 원칙이 될 수 있기를 주 안에서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