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주와 관련된 여러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은 음주는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있는 반면에 성경에는 기독교인의 음주를 금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오늘은 잠언 말씀이 어떻게 음주에 대해 말하는 지 배우고 은혜 받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그리스도인과 음주
I. 음주에 대한 강력한 경고들
음주에 관해 잠언의 대부분의 구절들은 부정적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잠언 20:1 “포도주는 조롱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날뛰게 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그것들로 말미암아 속는 자는 지혜롭지 아니하니라.” 포도주는 조롱하게 만듭니다. “조롱하다”의 의미는 하나님에 대해 조롱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조롱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반박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사람에게도 해당됩니다. 주위의 사람들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날뛰게 하는” 술기운으로 활력이 넘치는 것을 말합니다. “속는다”는 의미는 학식이 있는 사람, 교양이 있는 사람이 하지 말아야 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음주는 하나님과 사람을 조롱하게 만들고, 과도하게 흥분되어 하나님의 사람, 교양 있는 사람이 해서는 안 될 행동을 유발시킵니다.
또한 음주는 가난을 가져옵니다. 잠언 21:17 “쾌락을 사랑하는 자는 가난한 자가 될 것이요, 포도주와 기름을 사랑하는 자는 부하게 되지 못하리로다.” 술은 육신적인 쾌락과 연관이 있습니다. 포도주와 기름은 연회, 잔치, 파티를 의미합니다. 육신적인 쾌락을 쫒아 연회나 잔치, 파티를 열기를 좋아하는 자는 결코 부할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 음주는 단순한 독립적인 행위가 아닌, 연회, 잔치, 파티와 연관이 되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음주는 이들과 세트로 묶여 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음주를 육신적인 쾌락을 좋은 자들과는 교제를 할지 말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잠언 23:20-21 “술을 많이 먹는 자들 가운데 있지 말고 떠들며 고기를 먹는 자들 가운데 있지 말라.”
또한 잠언은 애주가들에 임할 6가지의 재앙들에 말해줍니다. 잠언 23:29-30 “재난이 누구에게 있느냐? 슬픔이 누구에게 있느냐? 다툼이 누구에게 있느냐? 재잘거림이 누구에게 있느냐? 까닭 없는 상처가 누구에게 있느냐? 붉은 눈이 누구에게 있느냐? 오랫동안 포도주에 머무는 자들에게 있고 섞은 포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자들에게 있느니라.”
여기서 “오랫동안 포도주에 머무는 자”는 늘 술에 취해 있는 자를 말합니다. “섞은 포도주를 구하러 다니는 자들”은 포도주에 더 독한 맛을 위해 무언가를 혼합하는 자를 말합니다. 이들은 포도주 하나의 맛에만 만족을 못하는 자들입니다. 더 독하고 자극적인 맛을 찾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이런 술집들을 찾아 돌아다닙니다.
29절에는 "누구에게 있느냐?"라는 말이 6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원래 '레미'라는 감탄사로, 이 말 뒤에는 보통 슬픔이나 고통의 말이 뒤따라 나오게 되어있습니다. 본문은 이 말을 반복해서 사용함으로, 술을 가까이 하는 자에게 임할 재앙들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의 재앙은 첫째, 재난입니다. 술에 과도하게 빠져 있는 자는 육체적인 질병이 발생합니다. 둘째로 슬픔은 이로 인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의미합니다. 셋째는 다툼이며, 넷째는 재잘거림입니다. 이는 항상 불평불만을 토해 내는 것을 말합니다. 술에 취한 자는 항상 알 수 없는 말들을 하는데, 이를 잘 들어보면 좋은 말이 아닌 불평과 불만의 말들입니다. 다섯째는 까닭 없는 상처는 맑은 정신이면 할 필요가 없는 행동을 함을 통해 얻어지는 상처들을 말합니다. 술에 취한 자는 물건들에 부딪히거나 다른 사람과 불필요하게 시비가 붙어 싸움을 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상처를 입게 됩니다. 여섯째는 붉은 눈입니다. 이는 눈의 멍을 말합니다. 이렇게 술에 만취한 자들에게는 육체적 질병과 사고가 뒤따르게 됩니다. 불필요한 싸움에 휩싸이게 되고 몸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말에는 늘 부정적인 말들을 하며 살 게 됩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이렇게 술에 머물며, 독한 술을 찾아다니는 자들은 바른 분별력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잠언 23:34-35 “참으로 너는 바다 한가운데 누운 자 같으며 돛대 꼭대기에 누운 자 같으리니 네가 말하기를, 그들이 나를 쳐도 나는 아프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나를 때려도 내가 그것을 느끼지 못하였도다. 내가 어느 때나 깰까? 내가 또 여전히 그것을 구하리라, 하리라.” 그들이 위험한 상황 속에 있는데도 인지를 못합니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 누워 있으면서도 안전한 돛대 꼭대기에 누운 줄 착각합니다. 아무리 때려도 맞고 있음을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이런 삶에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잠언 23:31-32; “너는 포도주가 붉거나 잔에서 제 빛깔을 내거나 스스로 똑바로 움직일 때에 그것을 바라보지 말라. 마침내 그것이 뱀같이 물고 독사같이 쏘나니” “포도주가 붉게 된다“는 의미와 ”제 빛깔을 내거나“ 의 의미는 가장 잘 익은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런 상태는 애주가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잠언은 그러할지라도 눈빛조자 주지 말도록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를 마실 때, 마치 뱀이 물고 독사와 독을 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잠언은 왕에게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는 것에 특별히 경계하고 있습니다. 31:4-5 “오 르무엘아, 포두주를 마시는 것은 왕들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독주를 마시는 것은 통치자들에게 합당하니 아니하니라. 그들이 마시다가 법을 잊어버리고 고난 받는 자들 주의 어느 한 사람의 재판을 굽게 할까 염려하노라.” 왕은 한 나라를 다스려야 할 사람입니다. 바르게 재판을 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런 자가, 분별력을 잃으면, 한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국가 전체가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별히, 왕은 포도주를 마시며 독주를 마시는 것이 합당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포도주와 독주는 왕을 망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음주가 한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국가까지도 위태하게 할 수 있음을 배웠습니다.
II. 음주에 인정한 특별한 경우
그러면 잠언이 음주에 대해 항상 부정적이지는 않습니다. 소극적이고 제한적이지만 음주에 대한 긍정적인 구절들도 있습니다. 잠언 31:6 “독주는 망하려는 자에게 주고 포도주는 마음이 무거운 자들에게 주라.” “망하려는 자”는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자를 말합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은 십자가의 고통 가운데 죽어가는 자들에게 독주를 주었습니다. 이 독주는 그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도 이 독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독주를 마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맑은 정신으로 온 몸으로 고통을 느끼시며, 온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으셔야 했기 때문입니다.
육체적 정신적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술을 마시면 그 술의 힘에 의해서 잠시 자신의 비참한 처지와 고통을 잊을 수 있습니다. 독주가 왕이나 성도들에게는 어울리지 않지만, 때로 몸을 크게 다쳐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아픈 사람, 또는 체온이 급격히 떨어져서 체온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임시적인 해결책이 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불면증에 걸린 사람에게 수면제를 주고,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사람에게 마취제를 주는 것처럼, 당시에 술도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습니다.
잠 9:1-6을 보면 지혜 부인이 집에서 만찬을 준비하고 성의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만찬에 오라고 초청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혜 부인은 만찬을 준비하면서 큰 집을 짓고 짐승을 잡아 요리하여 진미를 준비하고, 또 포도주를 희석시켜서 맛있는 음료를 준비하여 만찬상을 차리는 장면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잠언 9:2 “자기 짐승들을 잡고 자기 포도즙을 섞으며 또 자기 상을 차리고” 유대인들은 유월절 포도주를 만들 때에 포도주와 물을 1:3으로 섞어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포도주는 포도주 원액을 물에 희석시킨 음료수를 의미합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포도주를 물에 탄 이유는 포도주가 귀했으며, 또한 당시 사람들은 도덕적인 점에서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는 것을 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알코올을 희석해서 사람들이 취하지 않도록, 포도주에 물을 타서 마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포도주가 잔치와 연관이 되었습니다. 이 잔치는 앞서 언급한 육신적인 쾌락을 쫒는 잔치가 아닙니다. 여기서 지혜는 예수님입니다. 이 지혜부인으로 초청으로 온 자들이 잔치하는 기쁨을 포도주로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일곱 기둥은 하나님의 나라,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에 있는 성도들은 술을 통해 우리의 기쁨을 사지 않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님으로 인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늘 잔치하는 기쁨으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에서 우리는 음주의 부정적이고, 긍정적인 견해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이를 볼 때, 잠언은 , 과도한 음주의 결과에 대해 경고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를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음주의 중독성과 그로 인한 부정적인 결과들에 대해서는 강력한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의 약간의 음주는 가능할까요? 앞서 살펴본 것과 같이 음주를 금지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그러나 음주를 안 하는 것이 더더욱 좋습니다. 데살로니가 5:22 “악의 모든 모양을 삼가라” 음주는 우리를 유혹합니다. 작은 유혹이 우리를 사탄의 올무에 걸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저희가 속한 성경 장로교회는 음주에 있어 입에도 될지 말 도록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이런 가르침에 기초해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술을 마시고 안 마시고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음주를 하지 않는 것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는 초기 청교도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음주에 대한 부정적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 음주를 하지 않는 것이 전통입니다. 이는 좋은 전통이며 바림직한 전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이 과해져서 그렇지 못한 사람을 정죄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음주를 하는 것이 마치 나를 의롭게 하며, 나의 신앙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더 좋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서 기도하며, 선한 양심을 따라 노력해야 합니다. 경건한 삶을 살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음주가 우리의 신앙을 재는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