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말씀 요약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우리가 구하기 전에 우리 필요를 다 아시는 하나님께 왜 기도해야 하는 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도하기 전에 우리의 필요를 아신다면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할까요?
첫째,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특별하게 교통하고, 교제하는 특권이요 방편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하나님께 자신의 상황과 형편을 아룁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응답해 주십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조금씩 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알아가면서 처음에 가졌던 우리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교통하며 교제할 수 있는 엄청난 특권이요 방편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더 신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권능으로 당신의 자녀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일어난 것인지 구별하기가 어렸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감사의 찬양이 나오기가 어렸습니다. 그러나 오랜 기도 가운데 우리의 기도가 점점 구체화되고, 그리고 그 구체화 된 것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기도하면서 계속적으로 기도의 내용이 다듬어졌고, 이를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은 다른 일에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더 어려운 일도 낙심치 않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자신을 믿기보다 살아계신 하나님, 우리의 형편을 보시고 아시는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할 수 있게 됩니다.
셋째, 하나님과 동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하지 않더라도 당신의 구원 역사를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인간의 책임과 늘 함께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없이도 일을 하실 수 있는 분이지만 당신의 종의 기도와 함께 일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종과 다르게 일하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종을 택하시고, 당신의 종들이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기도에 기쁘게 응답해 주십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마음과, 이 세상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목격하고 증인 된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우기 전에 주기도문의 서론을 배우겠습니다. 세 가지를 배우게 될 것인데, 첫째는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자의 마음의 상태는 어떤 경계에 있어야 하는 지와 주기도문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자의 여러 모습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너희는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한 제자들
예수님께서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 우리에게 주님의 기도문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문은 우리에게 한 개의 기도의 원칙이 될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기도하라고 하셔서 이것 자체가 우리에게 하나의 기도문이 됩니다. 누가복음 11장에도 주님의 기도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누11:1-4) 이건 좀 다른 경우에 주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그분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다가 마치시매 그분의 제자들 중의 하나가 그분께 이르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 같이 우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소서, 하니“(누11:1) 예수님의 제자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할 때에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기도를 배운 것을 상기하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누가복음 5:33에 보면 ”그들이 그분께 이르되,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들의 제자들 또한 그리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까? 하매“ 세례 요한은 그의 제자들에게 금식과 기도에 대해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하나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하고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멈춰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동기를 잠깐 생각해 보면, 분명히 제자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유대 사람인 까닭에 절기를 따라서 또한 안식일마다 기도하는 소리를 많이 듣고 보았습니다. 제자들은 바리새인들의 기도도 알고, 요한의 제자들의 기도도 알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을 보면 필연 그렇게 많이 기도를 했어도 결국 자신들의 기도가 얼마나 정당한지, 얼마나 유효한지, 또 이렇게 늘 반복하고 지내는 것이 옳은지에 대해서 의심을 가진 듯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차츰차츰 받은 감화에 의하여 자기네가 지금까지 생각했던 식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하나님께 무얼 구하고 기도한다는 것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사람은 어떠한 차원에 섰을 때에 정확하고 좋다고 하던 것을 자리를 높이 해서 더 높은 지평으로 올라갈 때에는 과거에 만족스럽게 여기던 것을 불만스럽게 여기고 부족하게 여기깁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과거에 하던 기도에 대해서 자기비판이 생겼고 부족한 것을 느낀 까닭에 다시 새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입니다. 주기도문은 그래서 나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기도를 모른다. 그러니 기도를 배워야겠다.’ 하는 생각으로 배우기를 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라는 것은 첫째는 이런 것이다. 둘째는 이런 것이다. 셋째는 이런 것이다’ 이렇게 가르치시지 않고 ‘이렇게 기도해라’ 하고서 기도문을 하나 만들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는 선배들의 하는 기도를 많이 들었습니다. 또한 우리도 우리 자신도 기도를 많이 했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고 실제로 했던 기도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바른 지에 대해 회의가 들 때가 있습니다. 신앙이 점점 자라갈수록 기도에 대해 알고 싶고 배우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집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우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어떤 생각과 태도를 삶을 살아야 하는 지에 배우고 있습니다. 이제는 새로운 차원에서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 더욱더 높은 수준에서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를 배울 때 제자들과 같은 간절한 심정으로 예수님께 기도를 배우고자 하는 심정이 우리에게 있어야겠습니다.
주기도문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
첫째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처음 가르치신 것이 아니다”는 주장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이 기도가 예수님 당신에게서 처음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여러 랍비들이 하던 기도의 언어나 사상들을 도입해서 만들어진 기도이므로 이것은 순전히 주님의 기도문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물론 랍비들의 글 가운데에 이 기도문에 있는 내용을 써서 기도한 것들이 많이 있고 그것이 예수님 이후뿐만 아니라 이전에 이미 그런 것이 여러 예들 가운데 나타나 있을지라도 이 기도에 나타나 있는 사상을 그대로 담은 것은 아닙니다. 주기도문에는 주님만이 부여하시고 주님만이 명확하게 증시하실 수 있는 독특한 사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아주 참신하고 창조적인 기도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 기도에 대해서 어렵게 생각하는 것은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하고 끝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는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기도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인데 이 기도만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안 빌어도 괜찮은가?’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빈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요구하시는 바를 지금 아버님께 말씀드렸습니다.’ 하는 뜻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생각과 예수님의 말씀하신 것, 즉 이 기도는 예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기도문 이상으로 예수님의 기도에 가장 부합하는 것은 없습니다. 거기에 다시 반복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하지 않더라도 이것은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요 예수님이 하시던 기도입니다.
셋째는 “교회 시대에는 이 기도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
이 기도는 어떤 시기에만 사용해야 할 것이고 이 은혜의 시대에는 이 기도가 별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주기도문의 대부분은 교회 시대에는 부적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왕국이 임하옵시며’ 하는 것은 지금 바로 천국이 땅 위에 임하게 해 달라는 말은 아니고 어쨌든지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7년 환난이 다 지난 후에 땅 위에 천년왕국 의 때를 의미하는 것일 테니까 지금 교회의 시대에 예수를 믿는 자들의 기도로서는 큰 의미는 안가진다‘ 하는 식으로 생각합니다. “또 그들이 이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시니라.”(누17:21) “하나님의 왕국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님 안에서 의와 화평과 기쁨이니라.” “영이 가나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하늘의 왕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요,”(마5:3)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날 때 이미 우리 속에 임하였습니다. 거듭난 자는 이미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은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기도문입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할 수 없다”는 주장에 대해서
우리는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터 위에서 우리가 죄 사함을 받는 것인데 예수님의 속죄의 사실은 없고 ’내가 남의 죄를 용서했으니 내 죄도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구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성경 전체에서 우리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의 공로가 아니면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죄를 용서받을 수 없습니다. 이는 성경의 일관된 주장입니다. 전체 문맥을 무시하고, 성경 한 구절만 떼어내서 주관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주기도문의 서론
1.여섯 개? 또는 일곱 개?
첫째, 간구한 내용이 몇 가지인가에 대한 논쟁
이 기도의 간구한 내용이 몇 가지인가 할 때에 어떤 사람은 일곱 가지라 하고 어떤 사람은 여섯이라고 합니다. 일곱 가지가 주장하는 이들에 의하면,
1)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2)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3)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4) “이 날 우리에게 일용할 빵을 주옵시고,”
5)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들을 용서하는 것 같이 우리의 빚을 용서하옵시며,”
6)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7)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이렇게 일곱 가지로 나눕니다.
그러나 개혁 교회에서는 여섯 가지로 보았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요리 문답 제99문부터 107문 사이에 나타난 것을 보면 간구를 여섯 가지로 했습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소서”“ 하는 간구를 하나의 간구로 강조했습니다. 시험에 들지 말게 할 뿐 아니라 악에서 건져 내 달라는 간구에는 하나의 사상이 거기에 포함돼 있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여섯 가지라고 하든지 일곱 가지라고 하든지 우리가 뜻을 해석하는 데 그렇게 큰 문제가 생길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2. 아래로 내려가는 기도
이 기도를 보면 첫 세 부분은 하나님께 관계되어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지게 하옵시며 아버지의 왕국이 임하옵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이러한 식으로 차츰차츰 내려옵니다. 차츰차츰 내려온다는 말은 무엇인가 하면 먼저 가장 본질적인 하나님께 대해서 이야기하고 하나님이 나타내시는 그 왕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번에는 왕국을 형성해 나가는 데에 발휘되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이야기를 해서 큰 데에서부터 차례차례 내려오는 기도를 하게 하셨습니다.
3. 위로 올라가는 기도
그러나 그 다음에 우리 자신과 관계된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올라가는 식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의 육신의 존재에 필요한 것, 즉 우리의 일용할 양식부터 이야기합니다. 그 다음에는 ‘우리에게 죄가 있느니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 해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사람으로 살게 해 달라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시험 가운데 빠져 들어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늘 건져 내셔서 자유로운 위치에서 하나님을 섬기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증시하는 사람은 시험에 들지 않아야 합니다. 악에서 빠져서는 안 됩니다. 시험에 들지 않는다고 할 때에는 지혜와 능력을 가졌다는 표시이고 악에서 건지심을 받았다고 할 때에는 악이 그를 지배하는 능력이 없다는 것을 표시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나의 이 인간적인 존재에서부터 시작해서 위로 올라가는 얘기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송영을 붙였습니다. 결국 또 다시 하나님께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송영이라는 것은 기도 전체에 대한 송영도 되지만 칼빈 선생 식으로 생각한다면 ‘악에서 건지시옵소서’ 하면 그 악에서 건지시는 하나님께는 우리를 악에서 건지셔야 할 이유와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악에서 건지셔야 할 이유와 거룩한 근거는 ‘원래 왕국이라든지 권능이라든지 영광이 그 악한 자에게 있는 게 아니고 아버지께 있지 않습니까? 그런고로 나를 건져 내시옵소서.’ 그래서 ‘다만’이라는 말이 붙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For thine is the kingdom, and the power, and the glory, for ever. Amen” 여기서 영어의 “For” 왜냐하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입니다. 우리가 악에서 건지심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거룩하신 근거는 우리가 하나님 왕국에 속했고 하나님의 권세 하에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있으니까 우리는 악에서 건지심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상을 토로한 것입니다.
4. 기도하는 자의 여러 위치들
그리고 이 간구 하나하나를 놓고 우리가 몇 가지로 구분해서, 이를 테면 내가 어떠한 사람으로 기도하느냐, 즉 기도하는 나의 여러 가지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자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고 기도할 때에는 아버지에게 무엇을 이야기하는 자녀로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2) 경배자로
그렇지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옵시며’ 할 때에는 하나님께 모든 거룩한 것을 돌린다는 뜻으로 경배하는 자의 위치에서 늘 그런 얘기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3) 백성으로
그 다음에는 ‘왕국이 임하옵시며’ 하고 기도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그 왕국의 백성이니까 그렇다는 말입니다. 그 왕국의 백성으로 하나님 앞에 기도를 올리는 것입니다.
4) 종으로
그러나 나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고 뜻에 대해서 집중해서 말할 때에는 자기가 그 뜻을 이루어 나가고 순종해 나가는 하나님의 종인 것을 자인하는 데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5) 사람으로
그 다음에 ‘우리에게 오늘날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소서’ 할 때는 ‘나는 양식을 먹고 사는 인간이고 물질을 가지고 사는 인간이로되 하나님이 먹이셔서 사는 사람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따라서 나는 하나님께 영육간에 모든 좋은 것을 다 받아야 살 수 있는 사람이라는 위치에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6) 죄인으로
그 다음에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할 때에는 죄인이라는 위치에 서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7) 나그네로
그 다음에 “우리를 인도하사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우리를 건지시옵서“ 하는 말은 내 길은 곧게 하나님의 영광의 나라를 위해서 그 왕국의 목표를 향해서 가야지 가다가 시험이 들어 딴 길로 가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고로 그리고 인도함을 받는 나그네로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주여. 나는 지금 알지 못하는 내 장래의 길이라는 길을 걷습니다. 시험이라는 데로 내가 들어가지 않게 하시고 나를 곧게 목표를 향해서 인도해 줍소서’ 이것은 순례자가, 나그네가 하는 얘기입니다.
8) 죄악에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자
‘악에서 구하옵서소’ 하는 얘기는 연약하여서 악에 영향을 받고 넘어질 수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9) 완전히 회복된 신자
그러나 ‘왕국과 권능과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할 때에는 ‘결국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의 모든 것이 되시는 까닭에 나를 온전히 소유할 것입니다’ 해서 하나님의 것으로서의 확신을 다시 회복한 신자로서 하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자기가 기도할 때의 위치를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해 가면서 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이 이 주기도문이 가지고 있는 큰 형식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다채롭게 여거 가지 위치에서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실로 이 주기도문 가운데에는 크고 거룩한 사상이 많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한절, 한절 배워 나가는 동안에 이런 크고 거룩한 사상을 배우고, 마음으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