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강한 전사에게 싸움을 넘기다
중심 명제
다윗이 복수를 포기한 것이 아니다. 더 강한 전사에게 싸움을 넘긴 것이다.
서론
우리는 살면서 한 번쯤 이런 경험을 합니다. 내가 잘해줬던 사람이 뒤돌아서는 순간. 그것도 내가 힘들 때. 가장 아픈 배신은 낯선 사람에게서 오는 게 아닙니다. 가장 가까이 있던 사람에게서 옵니다.
바로 그 감정의 자리에서 쓰인 시가 시편 35편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선택한 것은 복수가 아닙니다. 그렇다고 체념도 아닙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이 이 억울함 앞에서 무엇을 했는지를 따라가 보겠습니다.
I. 이 억울함, 느껴도 되는가?(11-16절)
11절부터 1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자신이 당한 일을 하나님 앞에 구체적으로 진술합니다. 거짓 증인들이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일들이 자신의 책임으로 떠넘겨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더 힘들어하는 것은 그다음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는 그들이 아플 때 굵은 베로 옷을 삼고 금식했습니다. 베옷은 당시 가장 깊은 애도의 표현입니다. 밥을 끊었습니다. 자기 혼을 겸허히 낮추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14절, 마치 자기 친구나 형제인 것처럼 행동했고, 자기 어머니로 인해 애곡하는 자같이 크게 몸을 굽히고 울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자식이 우는 것처럼. 이것이 다윗이 그들에게 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내가 힘들어지자 그들은 모였습니다. 그것도 잔치처럼.
"그들이 나의 역경을 기뻐하여 함께 모였나니" (15절)
어머니처럼 울어줬더니, 그들은 내 역경 앞에서 파티를 엽니다. 이것은 단순히 화가 나는 수준이 아닙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싶은, 심장이 조여드는 배신감입니다. 뼈를 깎는 듯한 억울함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다윗이 이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신앙이 좋으면 이런 감정을 느끼지 말아야 한다거나, 빨리 용서하고 넘어가야 한다거나—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것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꺼내놓습니다.
억울함을 날것으로 꺼내는 것이 불신앙이 아니라 기도의 시작이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이 신앙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 감정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갔습니다. 억울함이 기도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신앙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그 억울함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그것이 다음 질문입니다.
II. 이 억울함, 어디로 가져가는가?(1-8절, 17-24절)
1절부터 8절을 보십시오. 시는 이 억울함의 호소로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곧장 하나님을 향해 말합니다. '주여, 나와 다투는 자들에게 내 사정을 변호하시고 나와 싸우는 자들과 싸우소서.'
2절과 3절을 보면 더 구체적입니다. 큰 방패와 작은 방패를 잡으소서. 창도 빼소서. 다윗은 하나님을 전사로 부릅니다. 싸워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다윗 자신은 칼을 들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칼을 빼달라고 합니다.
17절에서 다윗은 다시 부릅니다. '주여, 어느 때까지 바라보려 하시나이까?' 이 물음은 하나님을 향한 절규입니다. 그리고 23절에 이르러 정점에 달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주여, 분발하여 일어나시고 나에 대한 심판을 위해 깨시옵소서." (23절)
이것이 다윗의 선택입니다. 자신의 손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싸워달라고 요청하는 것. 이것은 감정을 억압한 것이 아닙니다. 복수심을 없앤 것도 아닙니다. 심판권을 자기 손에서 하나님의 손으로 이양한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개인적인 원한을 푸는 도구가 아닙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요청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 해소가 아니라, 망가진 세상의 질서를 바로잡아달라는 공적 호소입니다. "나의 억울함을 갚아주소서"가 아니라 "주의 의가 바로 서소서"—이것이 저주시의 본질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12장 19절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칼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포기해서가 아닙니다. 더 강한 분이 싸우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칼을 내려놓는 것은 싸움을 포기한 게 아니라, 더 강한 전사에게 싸움을 넘긴 것이다.
복수심이 기도가 되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나를 태우는 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간 것입니다.
III. 이 억울함, 결국 누가 해결하는가?(9-10절, 27-28절)
9절과 10절을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옵니다. 아직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원수가 사라진 것도 아니고, 억울함이 풀린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내 혼이 주를 기뻐하고 그분의 구원을 즐거워하리이다.'
히브리 시가 문학에서 이런 표현은 단순한 미래형이 아닙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하나님이 하실 것이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과 다름없다는 확신의 언어입니다. 결과를 확인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사이심을 신뢰하기 때문에 먼저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뢰의 언어입니다.
그리고 시편은 27절과 28절로 끝납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다윗의 시선이 어디로 이동하는가입니다. 원수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양하는 말을 하리이다." (28절)
다윗의 시선은 원수에서 하나님의 의로 이동합니다. 억울함이 완전히 해소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의의 자리에 계신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해결의 증거는 원수의 몰락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대한 신뢰다.
우리는 종종 문제가 해결되어야 평안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원수가 쓰러지는 것을 봐야, 억울함이 풀렸다는 확인을 받아야 비로소 기도가 끝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다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의를 확인하는 것으로 시를 닫습니다. 이것이 이 시편이 정경에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억울함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결론
시편 35편은 해결을 보고하는 시가 아닙니다. 싸움을 넘기는 시입니다.
다윗은 억울함을 억누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날것으로 꺼냈습니다. 칼을 들지 않았습니다. 더 강한 전사에게 싸움을 넘겼습니다. 그리고 원수의 몰락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서 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시를 닫았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억울함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억울함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 복수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복수심을 더 강한 손에 올려드리는 것.
그리고 이 길을 먼저 걸으신 분이 있습니다. 까닭 없이 미움을 받으셨고(요 15:25), 선을 악으로 되돌려 받으셨으나, 심판을 자기 손으로 취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다윗의 기도는 완성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섰습니다.
다윗이 복수를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더 강한 전사에게 싸움을 넘긴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사이십니다. 그분이 싸우십니다. 그분의 의는 반드시 서고야 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