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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요한일서1:1~4
성경본문내용 1.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2.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며 너희에게 보이노라.)
3.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라.
4.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강설날짜 2026-04-09

 

들어가며

 

요한은 왜 이 편지를 썼는가?-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온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한 반박 

요한일서는 논문이 아닙니다. 편지입니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심상치 않습니다. 보통 편지는 발신자와 수신자를 먼저 밝히고 안부를 묻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인사말도 없이 곧장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합니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 안에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퍼지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진짜 육체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주장, 영적인 존재일 뿐이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요한의 반박: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셨다. 

그렇다면 요한이 1~4절에서 소개하는 이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본문은 세 개의 흐름으로 답합니다.

 

첫째: 계셨다 — 역사 이전에 존재하신 그리스도

요한은 편지의 첫 단어를 "처음부터"로 시작합니다.

그리스어로 ἀπ᾽ ἀρχῆς(아프 아르케스). "처음부터, 시작 이전부터"라는 뜻입니다.

ἦν(에인) — "있었다". 그리스어 미완료(Imperfect)형으로, 시작점 없이 지속된 존재를 표현합니다.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의 바로 그 동사입니다. 과거의 한 시점이 아닌, 시간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셨음을 말합니다. 요한이 Aorist(단순과거)를 쓰지 않은 것은 의도적입니다. 이 시제는 시작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있었다"에 쓰인 시제는 시작점이 없이 지속하다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시점에 "생겨났다"가 아니라 "이미 계셨다"입니다.

이것이 왜 중요합니까.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역사 안에서 시작된 분이 아닙니다. 베들레헴이 그분의 시작이 아닙니다.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것이지, 역사 안에서 생겨나신 것이 아닙니다.

성육신은 그분의 시작이 아닙니다.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며 너희에게 보이노라." 요한일서 1:2

 

2절의 표현이 정교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오시기 이전에, 그분은 이미 아버지와 함께 계셨습니다. 나타나심은 시작이 아니라 드러나심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함께 영원 전부터 계셨던 분입니다.

 

둘째:오셨다 — 역사 안으로 들어오신 그리스도

영원하신 분이 시간 안으로 오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사실을 추상적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감각의 언어로 말합니다.

1절에 동사가 네 개 있습니다. 들었고,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손으로 만졌다. 이것은 수사적 반복이 아닙니다. 청각에서 시각으로, 시각에서 응시로, 응시에서 촉각으로 — 점점 더 구체적이고 육체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ἐθεασάμεθα(에테아사메타) — 단순히 "보다"가 아닙니다. 주목하여 깊이 응시하다, 관찰하다는 뜻입니다. 스쳐 지나간 것이 아니라 충분히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ψηλαφάω(프셀라파오) — "손으로 더듬어 만지다". 부활 후 도마가 예수님의 상처를 만진 바로 그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성의 최종 증거입니다.

요한이 말하려는 것은 하나입니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는 관념이 아닙니다. 손으로 만져진 분입니다.

당시 퍼지던 이단의 핵심은 그리스도가 진짜 육체로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요한은 이것을 논리로 반박하지 않습니다.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는 한 문장으로 끝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은 영적 사건이 아닙니다.
들리고, 보이고, 만져진 역사적 사건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실제로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지도 않으셨습니다. 실제로 죽지 않으셨다면 실제로 부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요한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실재성을 이토록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신학적 논쟁이 아닙니다. 우리 믿음의 기초가 걸린 문제입니다.

 

셋째: 거하신다 — 교제와 기쁨을 주시는 그리스도

요한이 이 모든 것을 선포하는 이유가 3~4절에 나옵니다. 두 개의 목적이 선언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그것을 너희에게 밝히 드러냄은 너희 또한 우리와 교제하게 하려 함이니 참으로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이니라."

요한일서 1:3

 

첫 번째 목적은 교제입니다.

그리스어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는 단순한 친교나 모임이 아닙니다. 본질의 공유, 생명의 나눔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이 교제가 어디까지 연결되는지를 말합니다. 우리의 교제는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κοινωνία(코이노니아) — 어근 κοινός("공통된, 함께 가진"). 수평적 교제는 수직적 교제에서 흘러나옵니다. 우리가 서로 나누는 교제의 근거는 우리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나누는 교제입니다.

 

"우리가 이것들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1:4

 

두 번째 목적은 기쁨입니다.

그리스어 πεπληρωμένη(페플레로메네) — 완전히 채워진 상태가 지속되다는 뜻입니다. 어쩌다 한 번 느끼는 감정적 기쁨이 아닙니다. 넘쳐흐르는 충만함이 지속되는 상태입니다.

그리스도는 정보를 가져오신 것이 아닙니다.
교제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리고 그 교제 안에 기쁨이 있습니다.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그리스도가 역사 안으로 오셨고, 요한이 직접 목격했고, 그것을 선포하는 이유는 — 우리도 그 교제 안으로 들어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교제 안에서 기쁨이 충만해지게 하기 위함입니다. 

요한이 1~4절에서 소개하는 그리스도는 세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습니다. 역사 이전에 계셨던 분, 역사 안으로 오셔서 손으로 만져진 분, 그리고 지금 우리를 아버지와의 교제 안으로 이끄시는 분.

 

나가며
성경적 그리스도는 이 세 가지가 함께 서 있는 분입니다. 하나라도 무너지면 기초가 흔들립니다. 영원하지 않으신 그리스도는 구원할 능력이 없습니다. 실제로 오시지 않은 그리스도는 실제로 죽지 않으셨습니다. 교제를 주시지 않는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기지 않습니다.

계셨고 — 영원 전부터 아버지와 함께.
오셨고 —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역사 안으로.
거하신다 — 지금 우리를 교제 안에서 기쁨으로 채우시며.
이것이 요한이 소개하는 그리스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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