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 인한 고난 앞에서
베드로는 묻습니다. "너희가 선한 것을 따르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곧 현실을 직시합니다. 선을 행해도 고난이 올 수 있다고. 그렇다면 그 고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서야 합니까?
선을 행하면 누가 해하리요 — 그러나 현실은
13절의 질문은 수사적입니다. 선을 행하는 자를 해할 자가 없다는 원칙을 선언합니다. 여기서 "선한 것"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가토스(ἀγαθός)입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한 선이 아니라 본질적이고 내면에서 우러나오는 선함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14절에서 바로 현실을 직시합니다. "그러나 너희가 의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면." 선을 행해도 고난이 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역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고난당하는 자를 "행복한 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행복한"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마카리오스(μακάριος)입니다. 산상수훈에서 "복이 있나니"라고 번역된 바로 그 단어입니다. 세상이 주는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깊고 흔들리지 않는 복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 마음의 자리를 지키라
14절 후반부는 "그들이 두렵게 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사야 8장 12절의 인용입니다. 원수가 두려움을 무기로 삼을 때, 그 두려움에 굴복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그 대신 15절은 적극적인 대안을 제시합니다.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라." 여기서 "거룩히 구별하다"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하기아조(ἁγιάζω)입니다. 하나님을 마음의 가장 높은 자리에 모시는 행위입니다. 두려움이 마음을 차지하지 못하도록, 그 자리에 하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이기는 방법은 용기를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앉아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소망의 이유를 대답할 준비 — 아폴로기아
15절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 여기서 "대답"으로 번역된 그리스어는 아폴로기아(ἀπολογία)입니다. 법정에서의 변론을 뜻하는 단어로, 오늘날 기독교 변증학(apologetics)의 어원입니다. 신앙은 감정만이 아니라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왜 소망인지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방식을 규정합니다. 온유함(πραΰτης, 프라위테스)과 두려움(φόβος, 포보스)으로 하라고 합니다. 프라위테스는 단순한 부드러움이 아니라 힘이 있으나 통제된 상태, 즉 절제된 강함입니다. 포보스는 여기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입니다. 소망의 이유를 말할 때 교만하거나 공격적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선 자의 겸손과 절제로 말해야 합니다.
선한 양심 — 수나이데시스
16절은 "선한 양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여기서 "양심"은 그리스어 수나이데시스(συνείδησις)입니다. 함께(συν)와 안다(οἶδα)의 합성어로, 자기 자신과 함께 아는 것, 즉 내면의 자기 인식입니다. 선한 양심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실에 대해 부끄러움이 없는 내면의 상태입니다.
베드로는 이 선한 양심이 비방하는 자들을 결국 부끄럽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우리의 선한 행실을 거짓으로 비난하는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깨끗한 양심과 선한 행실은 그 자체로 가장 강력한 변증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낫습니다
17절은 결론입니다. "너희가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난을 피할 수 없다면, 선을 행하다 받는 고난이 악을 행하다 받는 고난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면, 그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나에게 묻는 질문
나는 지금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내 마음의 왕좌에 두려움이 앉아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앉아 계십니까? 내 안의 소망의 이유를 온유함과 경외심으로 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나의 수나이데시스, 내면의 양심은 지금 어떤 상태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