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교
지난 시간에는 애통하는 자에 대해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다가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을 찾으며 애통해 하는 사람은 팔복에서 말하는 애통하는 자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팔복에서 말하는 애통한 자는 첫째, 자신의 죄를 깊이 돌아보고 회개하는 자입니다. 우리는 이를 다윗이 간음한 후, 회개하는 것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의 죄와 그들이 맞이할 운명에 대해 애통하는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과 예루살렘의 파괴를 보시며 슬퍼하셨습니다. 또 다른 예를 예레미야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대언자 예레미야는 남 유다 백성들의 죄와 바벨론의 멸망을 대언하며 슬퍼했습니다. 이 시대 죄와 우리 친척과 이웃의 구원과 앞으로 있을 이 세상의 종말을 알고 슬퍼하며 기도하는 자는애통한 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감당할 때 마음에 슬픔이 있는 자는 애통한 자입니다. 적극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때 느낄 수밖에 없는 슬픔이 있습니다. 이런 자가 바로 애통한 자입니다.
애통한 자는 위로는 받습니다. 이 위로는 우리의 삶을 다하고 저 천국에서 받는 위로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반드시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이는 성경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애통한 자는 위로를 받습니다. 첫째, 권고해 주십니다. ‘권고’란 의미는 마치 가족과 같이 우리를 돌봐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슬픔과 괴로움을 아시고 우리의 슬픔에 동참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애통할 때,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둘째, 기쁨으로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귀중한 씨를 가지고 나가서 우는 자는 반드시 기뻐하며 자기의 곡식 단들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시편 126:6) 우리가 이 땅에서 성령을 따라 걸으면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할 때, 사역의 열매가 있습니다. 이렇게 열매를 거둘 때 위로를 받게 됩니다.
오늘 말씀
오늘 말씀은 온유한 자에 대한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온유함은 무엇이며, 온유한 자의 심성과 태도는 무엇인지를 배울 수 있습니다. 온유한 모습의 실제 예들을 성경에서 찾아보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온유하다는 말의 의미
성경에서 사용된 온유하다는 말은 돈 많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교만이나 세력으로 인해 어떤 사람이 느끼는 고통과 괴로움을 표시하던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온유’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아나‘(עָנָו) 라는 단어는 말은 ’슬프다‘,’고통스럽다’는 말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왜 이 ‘고통스럽다’ 의미에서 ‘온유’라는 의미가 발전되었느냐하면 고통스러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온유’의 진면목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온유’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때는 환난이 오고 압제가 올 때에, 한 사람은 온유한 사람으로 나타나고 또 한 사람은 그렇지 아니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고통이 있고 괴로움이 있고 환난이 있을 때에 사람은 대개 그 상황에 대해 그것에 대해 맹렬하게 일어나서 반격하고 나가는 강한 호전성을 보입니다. 반대로 자신의 힘이 부족함을 느끼고 자신이 손해 볼 것을 계산하여 참거나 잊으려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온유함이 아닙니다. ‘온유’는 마음 가운데 슬픔을 전능하시고, 공의로 재판하시는 하나님께 나아가 그 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것입니다. 마음이 격노하고, 흥분된 상태가 아닌, 맑고 안정한 심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을 ‘온유’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의 정당한 태도
1. 감정을 조절하고 절제함
잠언 25:28
“자기 영을 다스리지 못하는 자는 무너져 내려 성벽이 없는 도시와 같으니라.”
자기 마음에 제어가 없는 자는 성읍이 무너지고 성벽이 없는 것처럼 원수의 공격 앞에 방비가 없는 상태입니다.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않고 성이 나면 나는 대로 내버려 두는 사람은 결코 성벽 없는 무방비 도시와 같습니다. 원수가 얼마든지 공격할 수 있는 성벽이 다 무너져 버린 도시와 같습니다.
에베소서 4:26
“너희는 화를 내도 죄는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진노하지 말고”
온유한 자는 자신을 컨트롤할 줄 아는 자입니다. 분 내는 것 때문에 이성을 잃어버려서 하지 못할 일을 한다든지 하지 않게 된다는 말입니다. 성내는 것을 잘 절제할 뿐만 아니랄 다른 사람의 성냄이 나를 격동시키지 않도록 참을성 있게 막아내는 것입니다.
잠언 22:24-25
“너는 노를 품는 자와 사귀지 말며 화를 품는 자와 함께 다니지 말지니 네가 그의 길들을 배워 네 혼을 올무에 빠뜨릴까 염려하노라.”
온유한 자는 분별력이 있습니다. 자신의 온유함을 지키기 위해 노를 품은 자와 사귀지 않습니다. 화를 품는 자와 다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향을 받을 위험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을 바라봄
시편 37:7a
“{주} 안에서 안식하고 끈기 있게 그분을 기다리라.”
온유한 자는 악인이 형통함을 본다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불평하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의 감정을 다 토해내므로 주 안에서 안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일을 주님께서 신원해 주시기를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베드로전서 3:9
“악을 악으로 욕설을 욕설로 갚지 말고 오히려 그와 반대로 축복하라. 이런 일을 위해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줄 아나니 이것은 너희가 복을 상속받게 하려 함이니라.”
온유한 자는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 가해를 가하거나 복수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맡기고 기다립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충분히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포기합니다. 전능자, 공의한 재판관에게 맡깁니다. 결코 자신의 감정에 휘달려 섣불리 행하지 않습니다.
로마서 12:19-20
“극진히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도리어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된바, 원수 갚는 일은 내 것이니 내가 갚으리라. [주]가 말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네 원수가 주리거든 그를 먹이고 그가 목마르거든 그에게 마실 것을 주라. 그리함으로 네가 그의 머리 위에 숯불을 쌓으리라.”
이 말씀은 원수에게 아부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일부러 찾아가 원수를 대접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비록 원수이지만 그가 물을 마시지 않으면, 음식을 취하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에서는 그에게 물과 음식을 주라는 의미입니다. 결코 그런 상황이 아닌데도 말씀을 오해하여 원수를 대접하고 하나님의 진노 그 사람의 머리 위에 쌓아 놓았다고 공연히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3.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음
마태복음 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 위에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가 너희 혼을 위한 안식을 찾으리니”
온유라는 말 자체가 부드럽다는 말입니다. 온유는 주께서 우리에게 무슨 명령을 하시면 우리는 아, 그렇습니까 하고서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농부가 소에게 멍에를 메여 쟁기질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소는 주인의 지시에 불평 없이 따라야 합니다. 부드럽게 주인의 지시를 따라야 하지, 고집을 피워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전 인생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때 마음이 부드러워야 합니다. 결코 마음이 뻣뻣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단련하려고 오는 불 같은 시련에 관하여는 마치 이상한 일이 너희에게 일어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으므로 기뻐하라. 이것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날 때에 너희가 넘치는 기쁨으로 또한 즐거워하게 하려 함이니라.”
환난을 도구로 써서 훈련시키시고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그 환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요구하시는 거룩한 덕을 더 기르고 쌓아 올리는 것이 온유한 자의 정당한 태도입니다.
온유한 자의 실례
1. 예(창세기 13:8-9)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형제라. 원하노니 나와 너 사이에, 내 목자들과 네 목자들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원하노니 너는 내게서 갈라서라. 네가 왼쪽을 취하면 나는 오른쪽으로 가고 네가 오른쪽으로 떠나면 나는 왼쪽으로 가리라, 하니라.”
아브라함은 롯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그의 나이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롯의 삼촌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동안 롯을 부지런히 보살펴 준 것으로 인해 자신의 공로를 삼지 않았습니다. 롯이 서로 가면 동으로 갈 것이고, 롯이 서로 동으로 가면 그는 서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재판관이 되어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2. 모세의 예(민수기 12:3)
“(이제 이 사람 모세는 매우 온유하여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였더라.”
모세는 시내 산에 와서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직접 면대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계시를 직접 받아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거룩한 산업 위에 법을 준 자입니다. 그는 자타가 공인하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민족의 지도자로서 권위 있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민족을 지도하고 인도할 때, 많은 저항이 있었습니다.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모세는 자신의 권위를 사용하여 그들을 제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려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그는 문제들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들에 대해 공의로 판단해주시기를 기도하였습니다.
3. 다윗의 예(사무엘하 16:9-10)
“이에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이르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원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하매 왕이 이르되, 너희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주}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셨으니 그가 저주하게 하라. 그런즉 누가 이르기를, 네가 어찌하여 그리하였느냐, 하겠느냐? 하고”
다윗은 그의 아들 압살롬으로부터 쫒기고 이었습니다. 이 때 사울의 집안에 시므이가 피난 길에 있던 다윗을 비난하고 조롱하였습니다. 이를 들은 다윗의 신하들이 분노하였습니다. 시므리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시므리의 말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비록 시므이를 죽일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이를 포기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렸습니다.
4. 사도 바울의 예(고린도후서 10:1)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힘입어 직접 너희에게 간청하노라. 내가 너희와 함께 너희 가운데 있으면 비천하고 떠나 있으면 너희를 향해 담대하지만”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3년 동안 눈물로 개척한 교회입니다. 그런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침투하였습니다. 일부 성도들은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하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구제 헌금에 대해 바울을 모함하였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그런 모금 운동을 한다고 중상모략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 일에 대해 격노하지 않았습니다. 이성을 잃고 맞대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잘못을 깨닫도록 노력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온유함이 무엇인지를 배웠습니다. 우리 교회가 힘써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써 바른 심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그 자태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교회와 개인에게 주신 사명을 깨달아 부지런히 사명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두가지 일에 각성하고 부지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날마다의 상황과 형편 속에서 이 온유함을 연습하고 테스트 받을 수 있기를 주 안에서 소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