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말씀 요약
지난 시간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배웠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여러 이유 중에서 특별히, 고린도후서의 바울의 가시를 제거하시기를 거절하신 이유들에 배웠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사단과 같이 교만해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영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의 성장과 성숙을 위해 애써 외면하는 것과 같습니다. 코치가 선수의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도 계속해서 훈련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이를 통해 그의 내면이 하나님의 권능의 손에 붙잡혀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변화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들어날 것입니다. 바울은 과거 예수 믿는 자를 죽이던 자였습니다. 그런 자가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울 속에 역사하신 우리 주님의 권능이 바울의 삶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를 깨달은 바울은 자신의 자랑합니다.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는 거절하지만, 깨달음을 통해 바울을 더욱 깊고 놓은 영적인 세계로 인도하셨습니다.
오늘 말씀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기도를 들으시는 사실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 때로는 우리 기도와 다른 기도 응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A를 위해 기도했는데 응답 된 기도는 B입니다. 우리는 이런 기도의 응답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해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게 될 중요한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은 성령님의 기도에 응답 하신다.
기도에 있어서 성도의 연약함
“이와 같이“
“이와 같이”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입니다. 앞 절에서 사도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모든 만물이 신음하며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 된 자들 또한 신음하며 구속을 기다린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극심한 고통을 인내하게 하고 견디게 하는 것은 바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이 하나님의 자녀가 포기치 않고 계속해서 전진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를 또한 전진하게 하는 것이 또 있습니다. 바로 성령님의 우리 속에 사역입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 돕고 계십니다.”연약함“은 ”weakness“라고 단수로 번역되어 있는 성경도 있고, ”infirmities“라고 복수로 번역된 성경도 있습니다. 문맥상으로 볼 때, 복수가 더 타당한 해석이라고 여겨집니다. 사도는 우리 인간에게 많은 연약함들이 있음을 먼저 말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인간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수많은 연약함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시적인 연악함, 정신적인 연약함, 영적인 연약함들이 있습니다.
“도우시나니” 이 말의 의미는 물건을 들 때, 다른 한 쪽을 들어 준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무거운 짐을 들 때, 한 쪽만 들어서는 짐을 옮길 수 없습니다. 누군가가 다른 편에서 함께 들어줄 때, 수월하게 짐을 옮길 수가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이렇게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성령님도 우리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애쓰고, 전진하려고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힘들어 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도우시나니”의 시제는 현재형입니다. 이는 단 한번 일회성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우리에게 있는 수많은 연약함 주에서 특별히, 사도는 우리의 기도의 연약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는데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해야 함을 잘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적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진정 무엇을 원하는지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잘 모르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뜻과는 다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에 있어서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성령님
[성령]께서 말로 할 수 없는 신음으로
이는 우리의 육체적인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는 성령님의 고통을 묘사할 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하고 있을 때,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께서는 신음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친히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
이 구절에서 성령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돕고 계신지가 강조해서 들어나 있습니다.
(1) 친히
우리는 돕는 분은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사도는 이를 강조하기 위해 “친히”라는 단어를 사용해서 주어를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성령님은 삼위일체의 하나님 중, 제 삼위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연약함을 친히 돌아보십니다.
(2) 우리를 위하여
이는 전치사로서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해 주십니다.
(3) 중보하시느니라
이 단어는 이 구절에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위하여”라는 의미의 접두사와 “탄원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사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위하여”라는 단어가 두 번 강조되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탄원해 주고 계십니다.
성령님의 중보 기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께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 계십니다. 이는 성부 하나님이십니다. “살피시는”는 현재형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계속해서, 지속적으로 살피신다는 의미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살피고 계십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뇌와 우리의 고민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성령]의 생각이 무엇인지 아시나니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령님의 중보 기도도 듣고 계십니다. 성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도 듣고 계시면서 또한 우리 안에 내주하고 계신 성령님의 기도도 듣고 계십니다.
이는 그분께서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이니라.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 줄도 모르고 기도하는 것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기도를 드릴 때,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시면서, 우리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도록 기도해 주십니다.
성령님의 중보 기도의 결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는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지 못하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의 연약함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의 잘못 된 기도 대신에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기도를 우리 대신 해 주십니다. 그러면 마음을 살피시는 성부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도 듣고, 또한 성령님의 기도도 듣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기도에 응답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열심히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가 우리의 바라는 것과 다르게 응답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인간적으로 낙심이 되고, 우울하며, 슬플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병든 자식을 위해 기도했는데, 자식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합격을 위해 기도하며 노력했는데, 시험에 낙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지 않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하심을 잘 모릅니다. 인간은 양과 같아서 한 치 앞도 잘 분간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지금 당장 내게 불리해 보이고 손해가 되는 것 같아도 하나님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부르신 자들은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십니다. “협력해서”란 말은 “함께 일하다”입니다. 내 인생 일어나는 모든 일, 내가 보기에 좋은 일도, 또한 내 기준으로 볼 때, 불행한 일도, 다 같이 일을 해서 하나의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협력해서 하나님의 선을 이룹니다.
그것이 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선입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이 있습니다. 안경의 목적은 잘 보게 하는 것입니다. 시계의 목적은 시간을 정확하게 알려주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목적은 다 다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것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다르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신 결과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선”입니다.
여러분은 Lev. Park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True Life Bible Presbyterian church에서 파송한 선교사이고, 지금은 탄자니아에서 신학교 사역을 하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래 이 분이 영국에 사역지가 있어 가시던 중에 싱가폴에 잠깐 들렀습니다. 불행히도, 그만 지갑을 분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싱가폴에서 사역을 하면서 FEBC에서 계속 공부를 하여 박사 학위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 분을 신학교 사역에 귀하게 사용하고 계십니다.
요약과 결론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기도와 다른 기도 응답을 해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기도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중보 기도를 해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과 목적 가운데 계속해서 전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우리의 기대와 다른 응답에도 불구하고, 감사하며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