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말씀
지난 시간에는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즉시 응답해 주신다는 사실을 배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즉시 응답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즉각 응답해 주시는 이유는, 첫째,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그 때, 그 장소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주의 종을 격려하기 위함입니다. 이 하나님의 즉각적인 기도 응답은 주의 종을 크게 격려할 것입니다. 믿음을 더욱더 강화시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담대한 믿음으로 섬길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는 때가 있습니다. 몇 구절만 살펴보겠습니다.
시편 66:18
“내가 마음속으로 불법에 관심을 두면 [주]께서 내 말을 듣지 아니하시리라.”
잠언 28:9
“사람이 자기 귀를 돌이켜 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조차 가증한 것이 되리로다.”
잠언 21:13
“누구든지 가난한 자의 부르짖음에 귀를 막으면 그가 직접 부르짖어도 역시 들어 줄 자가 없으리라.”
야고보서 4:3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그것을 너희의 정욕에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
이상의 구절들을 볼 때, 하나님께 구하는 자가 말씀을 신령한 생활에 있지 않을 때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습니다. 우리의 정욕을 위해 구할 때, 듣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를 바울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한 바울의 기도에서 배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신다.
Part I 겸손케 하기 위해서(v7)
7절을 보십시오.
“계시들이 넘침으로 말미암아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시려고 주께서 내게 육체 안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사 나를 치게 하셨으니 이것은 내가 분량 이상으로 높여지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에게는 계시들이 넘쳤습니다. 특별히 1-6절에서 그는 낙원으로 채여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들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가 교만하지 할 목적으로 육체에 가시를 주었습니다. 여기에 사용 된 “높여지다” 단어는 그리스어에 두 단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용례는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를 높이신다고 할 때(마태복음 23:12, 베드로전서 5:6), 사용 된 단어는 “ὑψόω;
hupsoō“입니다. 또 다른 용례는 ”스스로를 높이다“입니다. 그 때의 단어는 ”ὑπεραίρομαι;huperairomai“ 입니다. 본문에 사용 된 ”높이다“란 단어는 후자입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데살로니가후서 4:2에 사용되었습니다.
데살로니가 2:4절
“그는 대적하는 자요, [하나님]이라 불리거나 혹은 경배 받는 모든 것 위로 자기를 높이는 자로서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가 [하나님]인 것을 스스로 보이느니라.”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거절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목적은 바울을 겸손케 할 목적이었습니다. 사탄은 스스로를 높인 자입니다. 하나님께 대적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사탄과 같이 스스로를 높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육체의 가시를 주시므로 그를 겸손케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첫 번째 이유는 우리를 겸손케 하기 위함입니다.
Part II 성숙케 하기 위해(v8-10)
바울의 육체의 가시
바울의 육체의 가시에 대한 다양한 의견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간질병이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또한 어떤 분들은 눈의 질병이었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바울의 전도를 훼방하는 유대교 신자들이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어떤 분은 교회 내에 있었던 거짓 지도자였다고 말씀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마지막 견해를 지지합니다.
그 근거로는
첫째, “사탄의 사자”
사탄의 사자는 “사탄에 의해 만들어진 천사”라고 번역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천사는 교회의 감독입니다.(요한계시록 1:20) 그러므로 사탄에 의해 만들어진 교회의 감독은 교회 내의 지도자를 의미합니다.
둘째, “떠나가도록”
이 단어는 어떤 공간이나 장소를 떠나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거하다”, “못하게 하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의 용례는 물건보다는 사람에 더 많이 사용됩니다.
셋째는, “모욕”
바울은 자신의 연약한 점들을 11장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러나 12장에서 “모욕”이라는 단어처음 등장합니다. 고린도전후의 큰 주제는 고린도 교회 내의 거짓 가르침을 들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바울은 많은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됩니다.
세 번 기도한 바울
바울은 이 일로 인해 세 번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겸손함을 위해 육체의 가시를 주신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이는 너무도 큰 고통이었습니다. “치게 하셨으니”의 의미는 “주먹으로 눈을 때리다“ 의미가 있습니다. 눈을 주먹으로 세게 맞는 것은 크나큰 고통입니다. 또한 이는 ”현재형“입니다. 이는 바울의 고통이 계속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 때문에 세 번이나 자신에게서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
9a절을 보십시오.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하셨느니라.” 그
“그분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는 “완료형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는 “마지막으로 말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이 문제로 바울과 대화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이를 볼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족하도다”의 의미는 “만족스럽다”, “충분하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의 은혜가 바울에게 충분하였습니다. 더 이상의 은혜가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의 강한 능력은 약한 데서 완전해지느니라“
“완전해지다”란 의미는 “필요한 과정을 끝내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어떤 결과를 가지고 다음 단계로 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목표 혹은 목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바울에게 연약한 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 바울을 완전한 곳으로 인도해가고 계셨습니다. 이 또한 ”현재 시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반복적으로, 바울은 완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반응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신 목적을 깨달은 바울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9b를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오히려 크게 기뻐하며 나의 연약한 것들을 자랑하리니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기뻐하며”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자랑하리니”
“이는 고개를 높이 들다”는 의미입니다. 과거에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온전함으로 인도해 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연약함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랑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권능이 내 위에 머무르게 하려 함이라”
“머무르게”의 의미는 “텐트를 치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구약의 성막을 연상시킵니다. 성막 위에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 “세키나의 영광의 구름”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권능이 계속적으로 자신 안에서 일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연약함을 사용하셔서, 영광의 빛이 비추기를 원했습니다.
술과 마약에 찌든 자가 변화되어 주님을 섬길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 사람 안에서 일하셨음을 사람들이 인정합니다. 세상의 물질을 추구하던 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의 제자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그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기도의 변화
이제 바울의 기도가 바뀌었습니다. 과거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가”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의 연약함”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 바울의 연약한 점을 완전케 하고자 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에게 더 이상 “육체의 가시”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육체의 가시”는 자신의 연약함이 완전함에 이르는 수단이요, 도구였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연약한 것들과 치욕과 궁핍과 핍박과 고난 당하는 것을 기뻐하노니 내가 약할 그때에 내가 강하니라.”
바울에게는 “육체의 가시“ 외에도 다양한 연약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치욕”
이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모욕”을 의미합니다.
“궁핍“
이는 생활할 때 필요한 돈과 물건들을 의미합니다.
“핍박”
이는 사람들로 받는 환란을 의미합니다.
“고난”
이 의미는 “좁은 길에 서 있다“ 의미입니다. 좁은 곳에 갇혀 있을 때, 육체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육체의 고통이 심적인 고통으로 줍니다. 이는 성도가 받는 내적인 고통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바울에게는 이러한 다양한 연약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사도는 더 이상 이런 연약한 것들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여전히 그는 연약하지만, 또한 그는 강합니다.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이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도의 거절은 바울의 생각의 변화로 나타났습니다.
요약과 결론
하나님은 때로는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십니다. 첫째는, 우리를 겸손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우리를 성숙케 하기 위함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우리의 육체의 텐트 안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변화 된 모습,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들이 볼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 때, 우리의 기도가 거절되었을 때에도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 제목이 변화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 우리가 더욱더 영적으로 성숙해지기를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거절하시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기도의 거절은 또 다른 응답의 형태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