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말씀
지난 시간에는 남 유다 제 12대 왕 요담에 대해 배웠습니다. 요담 왕은 크게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 앞에 크게 잘한 것도 없는 왕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 웃시야가 교만히 행하다가 나병이 난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백성들이 악하게 되어 가는 상황에서 지도력을 발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소극적으로 행하였습니다. 자신의 신앙만을 지킬 줄 알았지, 백성들의 신앙을 챙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무책임한 왕이었습니다. 우리들의 공동체에 하나님께서 지도자를 세우실 때는, 하나님을 대신해서 섬기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 의도를 무시하고, 힘써 행하지 않는 것은 영적 지도자로써 무책임한 것입니다. 이런 무책임한 지도자 밑에 있는 성도들은 바른 생각을 가지고 행해야 하는데, 상황을 이용해 더욱더 악한 길로 갔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에 교훈을 얻어야겠습니다. 사람을 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길을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말씀
오늘은 유다 제 13대 왕 아하스에 대해 배우겠습니다. 남 유다 왕 아하스는 악한 왕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왕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믿고, 세상을 믿는 왕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아하스 왕의 불신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징계를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징계와 은혜
아하스의 왕의 배교
북이스라엘 베가의 때에 남 왕국 유다에서는 요담 왕의 뒤를 이은 아하스가 왕이 되었습니다.(열왕기하 16:1) 그는 남 유다 왕국의 왕 중에서도 특별히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가 이스라엘 왕들의 길들로 걸었으며 또 바알들을 위해 부어 만든 형상들을 만들었더라. 또 그가 힌놈의 아들의 골짜기에서 분향하며 {주}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교도들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이들을 불 속에서 태우고 또 여러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밑에서 희생물을 드리며 분향하였더라”(역대기하 28:2-4)
아하스는 북이스라엘 왕들과 같이 우상 숭배의 길을 걸었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이 도입한 바알 우상을 만들어 섬겼습니다. 또한 그는 힌놈의 골짜기에서 아이들을 불 속에서 태워 분향하였습니다. 이는 암몬 족속이 그들의 신 몰렉에게 행하던 풍습이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산당에서 우상 숭배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로 인해 남 유다를 벌하셨습니다. 아하스의 때에 시리아의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를 쓰셔서 남 유다를 징계하시고,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다움을 회복하도록 도우셨습니다.
위선 된 겸손
시리아 왕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의 침공 소식에 삼림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이 떨었습니다. 이에 하나님은 대언자 이사야를 보내어 그들을 위로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에게 이르기를, 조심하고 조용히 하라. 시리아와 함께한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의 맹렬한 진노로 인하여 또 이같이 연기를 내며 불타는 이 두 개의 나뭇조각 꽁지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낙심하지 말라..”(이사야 7“4 )
시리아의 머리는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는 연기가 나는 나무에 불과합니다. 지금은 불타고 있지만 곧 꺼질 것입니다. 두 개의 나무, 곧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은 거의 다 탄 나무꽁지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남 유다 하나님을 믿고 낙심하지 말라고 위로해 주고 있습니다.
“시리아의 머리는 다마스커스요, 다마스커스의 머리는 르신이며 육십오 년 내에 에브라임이 패망하여 한 백성이 되지 못하리라. 또 에브라임의 머리는 사마리아요, 사마리아의 머리는 르말랴의 아들이니라. 만일 너희가 믿으려 하지 아니하면 분명히 굳게 서지 못하리라, 하라.”(이사야서 7:8-9)
시리아의 수도는 다마스커스입니다. 이 다마스커스에서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르신입니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의미합니다. 그 수도는 사마리아입니다. 이 사마리아에서 다스리는 자는 베가입니다. 두 사람은 사람입니다. 인간일 뿐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해 보여도 인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왕은 누구입니까? 물론 아하스입니다. 그러나 그런 아하스를 위해 싸우시는 왕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이 남 유다를 대적해도 그들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남 유다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하나님께서 남 유다를 위해 싸우실 것입니다. 남 유다는 이 사실을 믿어야 했습니다.
“너를 위해 {주} 네 [하나님]의 한 표적을 구하되 깊은 곳에서든지 위로 높은 곳에서든지 그것을 구하라, 하셨으나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도 아니하겠으며 {주}를 시험하지도 아니하겠나이다, 하매”(이사야 7:11-12)
하나님께서는 이 약속의 표적을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하스가 “나는 구하지도 아니하겠으며 주를 시험하지도 않겠다고”고 말합니다. 일견 그에게 겸손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겸손은 거짓된 겸손입니다. 위선입니다. 배가 고프면, 고프다고 하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두려운 상황에서는 보호와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겸손입니다. 그러나 아하스 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두렵지 않은 척, 믿음 있는 척을 했습니다. 이것은 위선입니다. 하나님 앞에 이런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어려운 상황을 하나님 앞에 들고 나가 솔직히 아뢰고 도움을 청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것 같은데 자신의 내면 깊은 문제를 하나님께 고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가는 자는 솔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문제를 다 알고 계십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솔직하게 부모에게 자신의 필요를 구하듯이 그렇게 구해야 합니다. 뻔히 자신의 문제로 힘들어하면서도 하나님 앞에 나가 기도도 하지 않고, 기도해도 자신의 문제를 솔직히 인정하고 구하지 않는다면 이는 위선된 겸손입니다. 겉으로는 의로운 것 같지만 결코 그는 정직하지 못한 자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우리가 잘 아는 임마누엘의 표적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이를 낳는 기적을 통해 하나님께서 남 유다와 함께 하심을 보여 주실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아하스가 구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따라 행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시리아 왕 르신과 북이스라엘의 베가를 통해 아하시와 남 유다를 징계하셨습니다. 두 나라가 협력하여 남 유다를 침공할 때에 아하스와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의 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 같이 흔들렸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악한 왕에게라도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대언자 이사야를 보내어 하나님께서 친히 남 유다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표적을 구하라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표적을 구하는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한 것입니다.
남 유다를 징계하신 하나님
“{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께서 유다에게 진노하셨으므로 너희 손에 그들을 넘겨주셨거늘”
하나님은 남 유다의 죄에 진노하셨습니다. 그들을 시리아와 북이스라엘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1. 시리아가 남 유다에 큰 타격을 줌
시리아 왕이 남 유다를 침공하여 많은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시리아는 남 유다에 큰 타격을 주었습니다.
2. 북이스라엘이 남 유다에 큰 승리를 거둠
베가는 남 유다에 침공에서 하루에 십 이만 명을 죽였는데, 그들은 다 큰 용사였습니다. 또 그는 이십 만 명의 포로를 잡아 북이스라엘로 끌고 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오뎃이라는 대언자를 보내어 그들이 사마리아로 돌아오는 길을 막았습니다. 그리고 그 동족을 포로로 잡은 것에 대해 책망하였습니다. 북이스라엘의 우두머리 중에서 몇이 이 말을 듣고 노획물 중에서 옷과 신과 기름을 택하여, 벗은 자들을 입히고, 신발을 신기며, 기름을 발라 부상을 치료하여 고향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징계하시지만, 영원히 버리지 않으십니다. 징계의 목적은 돌이킴입니다. 비록 남 유다가 잘못했지만,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이 허락 한 그 이상을 할 때, 이를 책망하십니다. 남 유다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돌이키지 않는 아하스
1. 앗시리아 왕을 의존하는 아하스
이런 하나님의 징계 속에서 아하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와 그 백성이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지 생각을 해야 함에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살아 있는 하나님 대신에 사람을 더 의지했습니다. 앗시리아의 디글랏빌레셀에게 사자를 보내어 그를 도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성전의 금은보화와 궁전의 보화를 취하여 그에게 보내었습니다. 앗시리아는 지금의 시리아 위에 위치하였습니다. 지금의 이라크 제2의 도시 모술이 당시의 수도였습니다. 여기에서 지금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쿠스까지 쳐 내려와 왕 르신을 죽였습니다. 앗시리아가 남 유다의 청을 들어 준 것은 단순히 그들의 이익에 부합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토 확장을 꾀하던 차에 시리아를 쳐서 땅을 넓히기도 하면서 남 유다에서 보낸 조공을 받았습니다.
2. 이방의 제단을 만든 아하스
아하스는 다메섹에 있는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다메섹에 갔습니다. 아하스는 이 제단의 구조와 제도를 똑같이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어, 이것과 똑같은 것을 만들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그가 자기를 친 다마스커스의 신들에게 희생물을 드리며 이르되, 시리아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왔으므로 나도 그들에게 희생물을 드려 그들이 나를 돕게 하리라,”(대하28:23), 제사장 우리야는 아하스의 명대로 제단을 만들었으며, 다메섹에서 돌아온 아하스는 이 제단에서 제물을 바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3. 성전의 기구들을 변조시킨 아하스
아하스는 제사장에게 명하여 이제부터는 드리는 모든 제사의 제물을 저 새 제단에서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아하스는 물두멍 받침의 옆판을 떼어 없애 버렸고, 놋 바다의 놋 받침을 없애고 돌판으로 대신하였습니다. 또한 안식일 날 왕이 성전을 방문할 때 그늘을 만들어 주던 낭실을 헐었고, 오직 왕만이 성전을 들어가는 데 사용되던 낭실도 제거해 버렸습니다. 이렇게 성전의 모형과 제사 의식을 아하스 임의대로 변조한 이유는 조금이라도 앗수르 왕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아하스의 아부에서 기인된 것입니다.
에돔과 블레셋으로 징계하신 하나님
이에 하나님은 에돔과 블레셋으로 징계하셨습니다. 이에 아하스는 다시 한 번 앗시리아 왕에게 원군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앗시리아가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앗시리아는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의지하고, 그들이 나의 힘이 되어 줄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철저하게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입니다. 아하스는 이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유다의 모든 도시에 산당들을 세우고 다른 신들에게 분향하여 {주}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키니라.”(역대기하 28:25)
적용과 결론
오늘 우리가 아하스 왕으로부터 배우는 교훈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징계의 본래의 목적입니다. 하나님께서 남 유다를 징계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본질입니다. 이 문제가 해결되면 다른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됩니다. 히브리서 12:6-7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친히 징계하시고 자신이 받아들이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시느니라, 하셨느니라. 너희가 징계를 견디어 내면 [하나님]께서 아들을 대우하듯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자가 무슨 아들이냐?”
둘째는 아하스와 같은 악한 왕이라도 하나님께서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징계 중에서도 돌이킬 기회를 주십니다. 남 유다를 완전히 멸망당하게 두시지 않으시고 친히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 백성이 포로로 잡혀 갈 때에, 불쌍히 여기시고 대언자를 통해 다시 고향으로 돌려보내셨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의 징계의 목적을 알고, 또한 징계 중에서도 보호하시는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하스와 같이 끝까지 회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