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배경
이 시는 고통 중에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 시는 슬픔, 당혹감, 분노 등의 여러 감정들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시의 내용
1. 슬픔의 예배 (1)
우리가 바빌론의 강변에서 거기에 앉아 참으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강변에서
강변은 수로를 의미합니다. (에스겔 1:1)
바벨론 수로는 아주 유명합니다.
앉아
유대인들은 앉아서 예배를 들렸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는 성전 대신 회당이 생겨났습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회당이 없는 곳에서는 물 곁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물은 말씀과 씻는 회개를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 5:26)
그들의 예배는 눈물의 예배였습니다.
2. 현실의 당황스러움 (2~6)
고대의 전쟁은 신들의 전쟁입니다.
왕국이 멸망하면 그 왕국을 지키는 신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바벨론 정복자들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신을 위해 노래 부르라고 강요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 포로들은 이방인의 땅에서 노래를 부를 수 없었습니다.
이는 그들이 믿는 야훼 하나님이 바벨론의 신인 ‘마르둑’ 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마르둑'보다 열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God of gods입니다.
포로들은 결코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고 결단합니다.
정복자들이 아무리 요구해도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고 굳은 결의를 표현합니다.
3. 대적들에 대한 분노 (7~9)
에돔에 대한 분노
오바댜 10~14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사한 폭력으로 인하여 너를 덮고 “네가 영원히 끊어지리라.” 네가 저편에 서 있던 날 곧 타국인들이 그의 군대를 포로로 사로잡아 가며 외구인들이 그의 성문들로 들어가 예루살렘을 놓고 제비를 뽑던 날에 너도 심지어 그들 중의 하나 같았느니라. 그러나 너는 네 형제의 날 곧 그가 낯선 자가 되던 날에 바라만 보지 말아어야 했고 유다 자손이 멸망하던 날에 그들로 인해 기뻐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그들이 곤경에 처하던 날에 교만히 말하지 말았어야 했느니라. 너는 내 백성이 재난을 당하던 날에 그들의 성문에 들어가지 말았어야 했고 참으로 그들이 재난을 당하던 날에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대지 말았어야 했고 네거리에 서서 그에게 속한 자들 중에서 도망한 자들을 끊지 말았어야 했고 네거리에 서서 그에게 속한 자들 중에서 도망한 자들을 끊지 말았어야 했으며 그들이 곤경에 처하던 날에 그에게 속한 자들 중에서 남은 자들을 넘겨주지 말았어야 했느니라.
바벨론의 잔인함에 대한 분노
오 멸망 받을 바빌론의 딸아, 네가 우리에게 베푼 대로 네게 갚는 자가 행복하리로다.(8~9)
네 어린것들을 들어다가 돌에 메어치는 자가 행복하리로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여러 감정들이 복합적으로 우리 안에 생겨납니다.
슬픔, 당황스러움, 분노 등 포로기의 유대인들이 가졌던 감정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감정적인 시기가 필요합니다.
이런 감정의 격류를 거치고 감정의 흙탕물이 가라 앉은 다음에는 다시 말씀으로 돌아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찾아야 합니다.
시편 137편에서 머문다면 신앙의 진전은 없습니다.
시편 138편~150편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게 두신 선한 뜻은 이것입니다.
이사야 3:1~3
보라, [주] 곧 만군의 {주}께서 예루살렘과 유다로부터 의지하는 것과 의뢰하는 것 즉 그들이 의지하는 모든 빵과 의지하는 모든 물과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대언자와 분별 있는 자와 원로와
오십인 대장과 귀인과 조언자와 노련한 장인과 달변의 연설가를 제거하시느니라.
물질과 군대와 사람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살아 계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이방 문화에 젖어 있던 백성을 다시 한 번 하나님께서 부르시기에 위해 잠시 동안의 고난을 허락하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