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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시편 1:1~6
성경본문내용 1.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계획대로 걷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모욕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사람은 복이 있나니
2. 그는 {주}의 율법을 기뻐하며 그분의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도다.
3. 그는 물 있는 강가에 심은 나무 곧 제 철에 열매를 맺는 나무 같으며 그의 잎사귀 또한 시들지 아니하리로다.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형통하리로다.
4. 경건치 아니한 자들은 그렇지 아니하며 오직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도다.
5. 그러므로 경건치 아니한 자들이 심판 때에 서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로운 자들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니
6. 의로운 자들의 길은 {주}께서 아시나 경건치 아니한 자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강설날짜 2023-12-22

1. 서론

 

어떤 시편들을 보면, 인생이란 매우 자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곧 신자들은 형통하고 악인들은 재앙 가운데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종종 이것과는 너무나 다르지 않습니까? 예를 들어 시편 37편이나 112편, 128편을 읽을 때에 이러한 질문이 우리 마음에 일어나곤 합니다. 시편 1편을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편이 보여 주는 이미지 또한 너무나 분명합니다. 즉, 의인은 만사형통하지만 악인은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다는 것입니다.

혹자는 그러한 것은 구약 시대에나 해당되는 일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경건한 자들이 형통함의 복을 누리고 악인들은 이미 이생에서부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지만, 새 언약 시대인 지금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이 더 이상 형통함의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그보다는 훨씬 더 신령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들은 현세에서는 악인보다 더 자주 곤경에 처하고 있으며, 따라서 신자들은 세상의 마지막 날과 영생을 기다려야 할 것이라고들 말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시편 1편은, 혹은 적어도 이 시편의 일부분은 전형적인 구약의 성격을 지닌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시편 1편은 ‘전형적인 구약의 말씀’입니까? 이 질문을 제기하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이 시편은 얼핏 보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형통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도 옛 언약의 전형적인 특징이 아닙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견딜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인데(참조. 5절), 왜냐하면 실제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피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64문답).

 

따라서 우리는 이 시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1) 시편 1편이 제시하는 모습은 오늘날의 현실과는 더 이상 맞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2) 2절에 나오는 ‘율법’이라는 말을 오늘날에는 ‘복음’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습니까?

 

2. 개관

 

시편 1편에서 의인은 ‘참으로 복되도다!’ 하는 축하의 인사를 받고 있습니다

1~2절은 그러한 의인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보여 줍니다. 즉, 1절에서는 의인이 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2절에서는 의인히 하는 것에 대하여 말합니다.

3절은 의인이 축하를 받는 이유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마치 시냇가에 심긴 나무 같은 그의 인생 여정 때문입니다.

4~5절에서는 의인의 인생 여정과 대조하여 악인의 인생 여정을 제시함으로써 앞서 말한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6절에서는 앞서 말한 내용을 더욱 요약하여 말합니다. 더불어서 의인이 3절에서처럼 형통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말합니다. 그 이유는 여호와께서 의인의 길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3. 본문 주해

 

1

복 있는 사람은~” (원문은 ~한 사람은 복되도다’) 이어지는 내용에 해당하나는 사람이 복된 사람이고 축하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복을 ‘기원’하는 말이 아니라, 바로 그러한 사람이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고 ‘확인’하는 말입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그는 악인들의 권고를 따르지 않습니다. 악인들이 권장하는 인생관을 그는 배격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가 ‘죄인의 길에 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악인들의 생활 방식에 참여하지 않습니다.

오만한 자들”(원문대로는 ‘조롱하는 자들’) 그들은 지나치게 자신만만하여서 하나님과 그분의 교훈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잇다고 생각합니다(참조. 잠 1:22; 13:1; 15:12; 21:24). 그들의 조롱이 아주 위험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에게서 독립하려 하고 자기를 높이려는 이러한 사고방식은 오늘날도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편 1:1에서 말하는 사람은 조롱하는 자들을 멀리하고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가 그러한 사람들과 전혀 교류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편들임 말하는 “악인”과 “죄인”은 한나미의 친백성, 곧 시인이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시 10:4;50:16).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 밖으로 나가라고 하지 않으시고(참조. 고전 5:9~10) 다만 세상을 사랑하지 말 것을 요구하십니다 (참조 요일 2:15; 잠 1:10~19; 4:14~15; 고전 155:33; 고후 6:14~18). 바로 그것이 이 시인이 취하고 있는 태도입니다. 이 사람은 세상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악인들의 생활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그는 혼자입니다. 그는 악인들과 죄인들과 조롱하는 자들의 ‘무리 바깥에’ 존재합니다.

2

율법”이라는 말 때문에 혼란스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토라’입니다. ‘토라’는 문서로 남겨진 모세의 율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수 1:7) 하나님의 ‘토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모든 교훈을 포괄합니다. 그 교훈 안에는 그분의 계명들뿐 아니라 그분의 약속들도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그 교훈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휘하여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서도 이야기합니다. 여기 2절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들은 그저 딱딱한 규정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나는 은혜로 너를 그 종 되었던 데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출 20:2에 나오는 십계명의 선언을 참조하시오). 자기 백성이 구원의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율법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붙들라’, ‘나를 의지하라’, ‘나를 사랑하라’고 요구하십니다(참조. 요일 3: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4~95).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로 생명을 얻고 그 안에 계속 거하게 하는 방편입니다(참조. 신30:14~20; 레18:5). 따라서 그분의 계명은 삶을 위해서도 적합합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우리의 삶은 풍요로워집니다.

시편 1편에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묵상’합니다. 다시 말해 그 율법을 읽고 공부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즉, 율법에서 그는 기쁨을 맛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그에게는 기쁨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결단코 바리새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여서, 그는 ‘내가 여호와에게서 오직 그것만을 바랍니다’ 하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굳게 붙들기를 원합니다.

3

시냇가” 이 단어는 사람이 판 수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수로 곁에 심긴 나무는 항상 물이 충분합니다. 심지어 땅이 메말라도 그 나무는 마르지 않으며, 그러한 상황에서도 결실기가 되면 정상적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이 나무는 1~2절에서 묘사한 사람 안에 잇는 생명력에 대한 은유입니다. 그는 자신의 하나님을 굳게 붙잡고 있기에 그에게는 능력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그 능력을 주십니다. 여기서 사용된 은유는 예레미야 17:5~8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다음의 구절들을 보시오. 시 52:8; 92:12~15)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하나님의 자녀가 수고하는 일들은 때로 실패인 것처럼 보이나 그럼에도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고전 15:58).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사용하시며 거룩하게 하셔서 그분의 나라로 가져가십니다.

4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키질을 하면 겨는 알곡에서 분리가 되는데, 키질할 때 곡식을 공중에 날리면 겨는 바람에 날려가고 알곡과 짚은 타작마당에 다시 떨어집니다. 악인은 여기서 아무 무게도 없고 쓸모도 없는 겨에 비유되고 있습니다.

5

그러므로 악인이” 악인들은 아주 약한 바람에도 날려 가는 겨와 같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면 그들은 견뎌 낼 수 없습니다. 주님을 굳게 붙잡지 않으므로 그들에게서는 1~3절의 사람이 지닌 능력을 볼 수 없습니다.

의인들’은 자신들의 공로로 여호와 앞에 의롭다 함을 받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참조 시33:1,18). 하지만 그들은 또한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의 계명을 사랑함으로써 나타내 보입니다. 의인들의 모임인 교회에서 죄인들을 제거될 것입니다.

6

”의인의 길은” 여기서 ‘길’은 의인의 삶과 악이의 살을 비교해서 보여 주는 그림입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자녀들의 삶을 모두 아시며 사랑 안에서 관심을 가지고 돌보십니다.

 

4.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노래인 시편 1편

1) 

시편 1:1은 ‘의인’의 생활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는 것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그는 ‘무리 안에 들지 못하는’ 사람이고, 자신이 속한 백성에 맞서 투쟁해야 하는 자입니다. (2장의 III에서 1절에 대한 설명을 보시오.) 시편의 책은 의인이 겪는 그러한 어려움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시편 6편과 10편, 특히 73편과 같은 탄원의 시들을 떠오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1편은 시편의 책을 처음 여는 시입니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회중에게 주신 첫 번째 노래입니다. 이 시를 통하여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십니다. ‘믿음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붙들라, 곧 나를 믿고 내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삶에 복이 있을 것이다.’ 비록 이제 곧 탄식할 만한 일들이 가득하게 될 상황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2)

구약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약속받았던 복은 형통함이라는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서론에서 언급된 시 37;112;128 등을 보시오.) 그러나 이 형토함 자체에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이러한 형통함은 오로지 하나님의 호의이고 사랑이며 그분이 주시는 복입니다. 형통함은 오직 그것이 하나님의 호의를 나타내는 증거인 점에서만 가치가 있습니다. 신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호의를 나타내실 때에 항상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또한 하나님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하셨던 것보다 오늘날 우리를 더 강하게 시험하실 수도 잇습니다. 즉, 우리를 향한 호의의 증거를 하상 형통함과 부유함의 형태로 내려 주시지는 않는 것입니다.

3)

시편 1편의 ‘의인’은 율법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는 자기의 의로써 하나님께 무엇을 얻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율법에 대한 그의 사랑은 오히려 모든 기대를 하나님께만 두는 모습을 정당하게 드러낼 뿐입니다. (III에서 2절과 5절의 해설을 참조하시오). 따라서 신약 시대의 교회는 2절의 ‘율법’을 ‘복음’이라는 말로 대체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옛 언약과 새 언약 간의 그 모든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생활함으로써 그분의 약속과 은혜의 언약을 굳게 붙잡을 것을 요구하신다는 그 한 가지는 여전히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구약 시대든 신약 시대든 율법은 하나님께서 값없이 주신 구속에 대하여 우리가 감사하는 삶의 규칙입니다. 두 경륜 모두에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입니다(참조. 갈 5:6).

4) 하나님께서는 시편 1편을 자기 백성의 입술에 두심으로써 그들이 이 시편에서 복 있는 자로 선언하는 ‘의인’처럼 살도록 권고하십니다.

헤르크 크바컬G.kwakel., & 밥 파위크Vujk. (201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찬송(1판). p28~39 성희찬(번역). 서울:성약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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