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제기
이 시편은 얼핏 보기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견딜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건인데 (참조 5절), 왜냐하면 실제로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는 일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피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59~64문답).
일부 복음주의 진영에서는 새 언약이 옛 언약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즉, 옛 언약에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의롭게 되었지만 새 언약에서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시편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마주하게 됩니다.
2절에 나오는 ‘율법’이라는 말을 오늘날에는 ‘복음’으로 바꾸어야 하지 않습니까?
답
“율법”이르는 말 때문에 혼란스러워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말의 히브리어는 ‘토라’는 문서로 남겨진 모세의 율법의 율법을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수1:7) 하나님의 ‘토라’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모든 교훈을 포괄합니다. 그 교훈 안에는 계명들뿐 아니라 그분의 약속들도 주어져 있습니다.
또한 그 교훈은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자기 백성을 위하여 행하신 일들에 대하여서도 이야기합니다. 여기 2절에서는 특히 하나님의 계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계명들은 그저 딱딱한 규정들을 모아 놓은 것이 아닙니다. 그 계명들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는 것들입니다. ‘나는 은혜로 너를 그 종 되었던 데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다”(출 20:2에 나오는 십계명의 서언을 참조하시오.) 자기 백성이 구원의 상태에 머물기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율법에서 무엇보다도 ‘나를 붙들라’, ”나를 의지하라”, “나를 사랑하라고”고 요구하십니다. (참조 요일 3:23,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94`95문답).
율법에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로 생명을 얻고 그 안에 계속 거하게 하는 방편입니다. (참조 신 30:14~20; 레 18:5). 따라서 시편 1편에서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율법을 굳게 붙잡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묵상’합니다. 다시 말해 그 율법을 읽고 공부합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즉, 율법에서 그는 기쁨을 맛봅니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그에게는 기쁨이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결단코 바리새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여서, 그는 ‘내가 여호와에게서 오직 그것만을 바랍니다’ 하는 태도를 드러냅니다. 그는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붙들기를 원하며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시는 구원과 생명을 굳게 붙들기를 원합니다.
헤르크 크바컬G.kwakel., & 밥 파위크Vujk. (2016).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찬송(1판). p32~40 성희찬(번역). 서울:성약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