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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마가복음 9:33~37

말씀: 마가복음 9:33~37

 

지난 시간에는 믿음에 대해 배웠습니다. 믿음은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님을 배웠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으로 나오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을 깨닫고, 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줄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기도와 금식이 필요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뜻을 알았다할지라도 믿음으로 실행하기 위해서도 기도와 금식이 필요합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과거 자신들이 마귀들을 내어 쫒은 경험을 믿었습니다. 자신들에게 능력이 있음을 믿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마귀에 고생하는 아이를 고치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구해야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한 후에는 믿음에는 확신이 생깁니다. 의심이 사라집니다. 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할 때, 믿음의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제자도를 가르치고 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 죽음의 임박함을 아셨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후, 본격적으로 제자의 도리에 대해 가르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우리는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가르치셨음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그렇게 하지 말도록 강하게 권하였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또한 부활에 대해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위해 예수님은 부활하신 모습을 제자들에게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 야고보, 요한에게 보여 주셨지만 이는 마태복음, 누가복음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수의 제자들에게 먼저 보여 주시고, 이 제자들을 통해 다른 제자들과 이 사실이 널리 공유 되도록 하셨습니다. 제자들과 이들을 따르는 무리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에라야 비로소 부활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확신 위에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먼저 예수님께서 세 제자들에게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말씀은 계속해서 제자의 도리를 가르치시는 예수님을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국에서 진정한 큰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큰 자는 섬기는 자

자기 욕심의 합리화

3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일행이 가버나움에 이르렀습니다. 그동안 이방 땅인 가이샤라 빌립보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셨습니다. 실제로 부활된 모습을 보여주시기도 하셨습니다. 이제 다시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곳에서 제자들과 얼마의 시간을 보내신 후에, 예루살렘을 향해 가실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메시아 되심을 밝히신 후에, 유월절 어린양으로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실 것입니다.

 

가버나움은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 마태 다섯 제자의 고향이기도 합니다.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머문 곳은 베드로의 집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버나움으로 오는 길에 제자들 중에 어떤 문제로 논쟁하였는지를 질문하셨습니다. 이에 제자들이 잠잠하였습니다. 이를 볼 때, 스스로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살펴보면, 제자들이 “하늘의 왕국에서는 누가 가장 크나이까?”라고 예수님께 대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복음18:1)

 

이를 통해 제자들이 가버나움으로 돌아오는 노상에서 제자들 중에 “누가 큰 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으심 후를 대비하고자 이를 논의하였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제자들의 신앙 상태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을 받아들이고 준비할 정도의 신앙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이 땅에 건설된 메시아 왕국에서 열 두 제자의 서열을 매기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가장 두각을 나타내는 자는 단연 베드로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해서 신앙 고백을 하였습니다. 또한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또한 베드로의 강력한 경쟁자는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직접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를 요구하였습니다.(마가복음 10:37) 이를 마태는 이들이 그들의 어머니까지 동원하였음을 밝히며, 이를 두고 나머지 제자들이 두 형제에게 분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0:24) 이를 볼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여 자신의 서열을 맨 위에 두고자 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머지 제자들도 저 마다 마음속에 욕심이 있었음을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논쟁하였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논쟁”이라는 단어는 자신도 답을 모르면서, 답을 모르는 다른 사람과 다투는 가운데 더 깊은 혼란 속으로 빠져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결론이 날 수 없는 문제로 격론을 벌이며 시간을 낭비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들의 마음이 뜨끔 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의 속마음이 들통 난 것 같아 당황하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잠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인간적인 야심을 이내 영적인 것으로 포장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천국에서 누가 큰 자인지 질문을 하였습니다.

 

낮아질 수 있는 자가 큰 자

예수님은 진정 큰 자에 대해 제자들에게 두 가지 방법으로 가르치셨습니다. 첫째는 강의를 하시고, 둘째는 직접 시청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시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강의를 통해 큰 자가 누구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35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바로 그 사람은 모든 사람의 말째가 되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할지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큰 자는 말째가 되며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종”이라는 단어는 먼지를 떨어주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종들은 손님의 먼지를 떨어주는 자였습니다. 이들은 가장 비천한 자였고, 그 당시 가장 낮은 계급에 속한 자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의 가치관과 반대입니다. 세상은 첫째가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위에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공으로 향한 사다리를 열심히 올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 마귀는 자신에게 절하면 이 세상의 권세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권세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 만물을 구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낮아지심으로 가장 큰 자가 되는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마가복음 10:45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땅에 죄인들을 섬기러 오셨습니다. 모든 죄의 먼지를 떨어주시고자 십자가에 죄의 대속물로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빌립보서 2:6~11절에서는 이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높이심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형체로 계시므로 [하나님]과 동등함을 강탈로 여기지 아니하셨으나 스스로 무명한 자가 되사 자기 위에 종의 형체를 취하시고 사람의 모습이 되셨으며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하늘에 있는 것들과 땅에 있는 것들과 땅 아래 있는 것들의 모든 무릎이 예수라는 이름에 굴복하게 하시고 또 모든 혀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시라고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가식적 낮아짐

우리는 이를 예수님과 제자들의 유월절 만찬에서 그 예를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당시는 로마의 영향력과 문화 아래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예법에 의하면 ㄷ자형으로 그 서열대로 앉았습니다. 먼저 중앙에는 주인과 중요한 사람들이 좌우편에 앉았습니다. 그 다음의 서열은 테이블의 왼쪽 면에 앉았습니다. 그 다음의 서열을 가진 자들이 오른쪽 면에 앉았고 가장 서열이 낮은 자가 오른쪽 면 가장 끝자리에 앉았습니다. 성경의 기록을 볼 때, 예수님의 좌우편 자리는 요한과 유다였습니다. 요한은 그 당시의 관습에 따라 왼쪽으로 기대어 예수님의 품에 안겨 음식을 먹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음식을 찍어 유다에게 직접 먹이셨습니다.

 

베드로는 말석에 앉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가 배신할 지를 말씀하셨을 때, 요한에게 그가 누구인지 물어보라고 눈짓을 했음을 볼 때도, 요한과 베드로가 서로를 바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또한 베드로가 말석에 앉았음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은 예수님의 발을 씻기는 순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순서대로 씻기신 후에 마지막 차례인 베드로를 씻기셨습니다.

 

앞서 우리는 “종”이라는 단어가 먼지를 씻어 주는 자라고 배웠습니다. 많은 일 중에서 먼지를 씻어 주는 일은 종의 주된 일이었습니다. 먼지가 많은 건조한 지역을 걸어 다닌 자들이 가장 먼저 손과 발을 씻고 먹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은 비밀리에 이루어졌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눈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자리에서 종은 없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말석에 앉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모두가 기다렸지만 베드로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말석에 앉았지만 제자들의 발을 씻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습니다. 이는 스스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서열에서 밀려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꼴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기다리시다가 직접 수건을 허리레 두르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3:14 “그런즉 너희 [주]와 선생인 내가 너희 발을 씻어 주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마땅하니라.”

 

오늘 우리가 베드로에게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식적 낮아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겉으로 겸손해 보일 수 있습니다. 낮은 자리에 앉아서 사람들을 섬기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몸은 낮아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는 바른 겸손의 자세가 아닙니다. 이에 예수님은 다른 방법으로 제자들에게 진정한 낮아짐, 겸손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자발적인 섬김

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아이들 중의 하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며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는 자는 나를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부은 받아들이느니라, 하시니라” 여기서 “받아들이다”라는 의미는 기꺼이, 기쁨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 단어는 행위를 하는 주체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이는 자발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에서 진정 울러나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아이”의 의미

“이런 아이”는 가장 낮은 자를 의미합니다. 유대 지방의 관습상 결혼한 남자가 가장 높습니다. 결혼하지 않는 남자가 그 뒤를 있습니다. 또한 남자 다음으로 아이를 가진 여자가 맨 위의 서열입니다. 그 다음이 결혼한 여자, 결혼하지 않는 여자입니다. 이렇게 서열들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중에서 아이가 가장 낮은 서열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이”라는 단어는 큰 아이를 지칭하지 않습니다. 6~7세의 어린 아이를 지칭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서 보여 지는 특성은 순진 무궁함, 정직함 등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이를 예로 드실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위해서입니다. 6~7세의 어린 아이는 부모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이입니다. 분별의 능력이 없어 위험한 것을 하겠다고 떼를 쓰는 나이입니다. 또한 오늘 날은 어린 아이에 대한 인권이 향상되었지만, 당시만 해도 아이를 다른 집에 종으로 파는 것이 예사로 이루어졌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인권이라고는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시청각 교육을 통해 제자들에게 낮아지심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낮아지심은 진정으로 낮아져 섬기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익하게 보이는 사람도 기쁨으로 섬길 수 있는 자가 진정으로 겸손한 자요, 큰 자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겸손하게 섬길 수 있는가?

같은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 18:3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회심하여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하늘의 왕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 사용된 “회심”이라는 단어는 “돌이키다”, “변개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그로 말미암아 새 영혼의 활동 기능이 생기고 새 마음이 생겨서 첫째로 자기의 죄에 대해서 느끼게 되고, 둘째는 오직 예수 그리스만 의지하고 믿고 나아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회심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식적인 겸손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진정 자발적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말석에 앉고 다른 사람의 먼지를 떨어낼 수 있는 길은 예수님 안에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가치관을 거슬려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 마귀는 자신에게 절하면 이 세상의 권세를 준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상의 권세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이 세상 만물을 구하는 것을 원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들어갈 수 있는 회심한 자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큰 자는 예수님의 삶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입니다. 말씀과 성령으로 회심한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배우는 자라야 진정으로 낮아져서 겸손하게 섬길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님께서 먼저 그 본을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직위는 서열이 아님

교회 안에는 두 종류의 장로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장로, 목사와 다스리는 장로가 있습니다. 또한 교회의 여러 일들을 맡아 처리하기 위해 집사가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교회를 섬기기 위한 직분일 뿐입니다. 목사가 더 높거나, 장로가 더 힘이 세거나, 집사들이 더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두가 몸 된 교회를 섬기기 위해 주어진 직위일 뿐입니다. 그것이 서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특권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후에, 베드로와 요한은 서로를 섬기며 기도하러 올라가는 장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는 서열이 없습니다. 서열을 매기는 것은 이 후의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서열을 매기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서열을 매기고 다른 사람 위에 있으려고 하는 마음은 타락한 본성 때문입니다. 모두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를 따라 섬겨야 합니다. 거기에는 서열이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입으로 섬기는 자라고 세상과 사람들 앞에 말할 수 있습니다. 이를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베드로의 예처럼 가식적인 섬김인지, 진정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와 종의 자세로 섬기는 지는 하나님이 아십니다. 그리고 삶의 열매를 통해서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거듭난 자가 예수님만을 시선을 고정하고 살아가고 있는 지, 아니면 세상과 사람들에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 있는 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섬김이 가식적인지, 자발적인지는 주님이 아십니다.

 

오늘 우리는 제자들 내에서 서열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사건을 통해 진정 큰 자가 어떤 자인지를 배웠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정 큰 자는 겸손한 자입니다. 자신을 하나님 안에서 낮출 줄 아는 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배울 때 큰 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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