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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마가복음 11장 15~19
성경본문내용 15.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사고파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탁자와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뒤집어엎기 시작하시며
16.아무도 성전을 통해 기구를 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그들에게 말씀하시며 가르치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모든 민족들에게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매
18.서기관들과 수제사장들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자기들이 그분을 죽일까 꾀하니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랐으므로 그들이 그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더라.
19.저녁이 되매 그분께서 도시에서 나가시더라.
강설날짜 2017-05-28

 

우리는 예루살렘에 입성하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한 주 동안의 예수님의 삶의 여정을 자세히 살펴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흘 전인 월요일 이른 아침 베다니에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던 도중에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의 저주는 이스라엘의 심판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종교 형식만 요란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열매를 맺지 못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은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시켰습니다. 이 또한 이스라엘의 심판을 예언하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십니다. 계속적으로 잘못을 지적해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한 징계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영원히 기다려주시지는 않습니다. 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신앙생활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잘못된 신앙생활에 돌이켜야 합니다. 날마다 자신이 잘못된 것을 알고 돌이키는 것이 개혁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타락한 신앙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에 대해 배울 것입니다. 개혁하는 신앙이 무엇인지를 배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타락한 신앙, 개혁하는 신앙

Point I 타락한 신앙(v15~18a)

오늘 본문에는 타락한 신앙의 세 가지 모습들이 나옵니다.

 

첫째는, 타락한 종교 기득권자들입니다.

한 시대에 대제사장이 둘?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광야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하니라”(누가복음 3:2)

 

날이 밝으매 백성의 장로들과 수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즉시 함께 모여 그분을 자기들의 공회로 끌고 들어가 이르되,”(누가복음 22:66)

 

대제사장의 직무는 원칙적으로 죽을 때까지 섬기는 종신직이었고, 그 자손들이 대대로 직무를 이어 나가는 세습직이었습니다. 솔로몬 성전이 세워지고 바벨론에 의해 성전이 파괴되기까지의 1차 성전 시대(기원전 960~586)에는 이러한 원칙이 잘 지켜져 18명의 제자사장이 직무를 이어 갔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에서 귀환한 후에 세워진 스룹바벨 성전과 헤롯 성전으로 이어지는 2차 성전 시대(기원전 515~기원후 70)에는 85명의 대제사장이 있었다고 합니다. 어떻게 2차 성전 시대에는 그렇게 많은 대제자사장이 있었을까요? 대제사장직이 뇌물을 통해 사고 파는 부정부패와 권모술수의 온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예수님 당시의 대제사장을 두 명 언급하는데, 이는 당시의 종교적 타락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한 시대에 두 명의 대제사장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한 명뿐이어야 할 대제사장을 어떻게 수제사장들이라는 복수로 나타낼 수 있겠습니까? 복음서 전체를 통해 대제사장들이라는 표현이 무려 64회 나타나는데, 이는 당시의 대제사장 직분을 둘러싼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예수님 당시 안나스 가문은 로마에 엄청난 뇌물을 주어 대제사장직을 독차지했습니다. 주후 7년에 시리아의 총독 구례뇨가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세웠습니다. 그 후 주후 15년에 유대의 로마 총독 그라투스가 그를 면직시킵니다. 주후 16~17년에 안나스의 아들, 엘르아살이 잠시 대제사장이 되었다가, 안나스의 사위, 가야바가 주후 18~37년간 대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이는 새 총독이 돈을 벌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안나스는 아마 이 일을 자기 사위 가야바와 의논한 듯합니다. 왜냐하면 항상 그 둘이 함께 다니면서 의논을 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예수님을 살해하는 음모도 그 둘이 같이 하고 돌아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셨을 때 처음에는 안나스의 집으로 갔다가 가야바 있는 데로 갔다가 다시 빌라도에게 가서 거기서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가야바가 대제사장이었지만, 실질적 대제사장은 안나스였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실질적 제사장이었던 안나스의 이름이 앞에 나오고, 형식적인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를 뒤에 둡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돈의 갈취

원래 감람산 안에 네 군데 시장이 있어서 유월절과 같은 절기 때에는 거기에 가서 제물들을 살 수 있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나스 일당이 어떤 기간을 정해 놓고 그 기간 동안에는 감람산에 있는 시장이 아니라, 여기 성전에 와서 제물을 사라. 딴 곳에 산 제물은 철저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 공표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딴 곳에서 산 제물들에 대해서는 온갖 트집을 다 잡았습니다. 백성들은 할 수 없이 성전에서 제물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가격은 다른 곳에서 살 때보다 몇 배나 비쌌었습니다. 그들은 독과점으로 엄청난 이득을 얻고 있었습니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주후 66년의 유월절 행사에 소요된 희생제물은 양들만 따져서 이십오만 오천육백 마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를 볼 때, 당시 이 사업은 가히 상상을 할 수 없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습니다.

 

이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안나스 가문은 성전세로 바칠 반 세겔을 바꾸는 환전상도 운영했습니다. 출애굽기 3013-16절에 보면 이스라엘 장정들에게 부과된 성전세는 세겔이라는 화페로 내도록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는 고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용했던 세겔이 없었으므로 이와 비슷한 두로의 화폐를 성전세를 바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외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절기 때에 성전을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그들이 사용하던 화폐를 환전해야만 했습니다. 예전에는 예루살렘성전 밖에 환전소가 있어서 그곳에서 환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전통이었습니다. 예루살렘 밖에서는 누구든지 환전을 할 수 있었으나 많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은 이방인의 뜰을 환전하는 장소로 대여해주면 엄청난 이득을 거두어 들였습니다.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장사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그것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까지 내쫒았습니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상자를 놓아 둔 탁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또한 1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성전을 통해 기구를 나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장사꾼들과 환전상들은 성전을 그들의 지름길로 사용하였습니다. 성전의 여러 문들을 통해 장사 도구와 제물들을 신속하고 편리하게 옮겼습니다. 이는 대제사장의 묵인 하에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명백한 불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기록된바, 내 집은 모든 민족들에게 기도하는 집이라 불리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가 그것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도다, 하시매그들은 강도였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강도라는 단어는 폭력을 사용해서 공개 된 장소에서 훔치는 자를 말합니다. 약탈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아주 약탈할 상대들을 찾아 돌아다니다가, 목표물을 찾으면 사정없이 달려가 약탈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성전에 들어가 온 백성의 죄를 위해 제사해야 할 자가 사실은 약탈자였습니다. 머리에는 백성의 죄를 위해 슬퍼하기보다는 백성의 돈을 약탈할 생각 밖에 없는 자였습니다. 이런 자가 대제사장이었습니다.

 

둘째는, 타락한 종교에 침묵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18a절 보십시오. “서기관들과 수제사장들이 그 말을 듣고 어떻게 자기들이 그분을 죽일까 꾀하니여기에 서기관들이 등장합니다. 서기관들이 수제자들과 함께 예수님을 죽이고자 공모하고 있습니다.

 

서기관은 누구?

옛 중동에서는 글을 배우는 데 특별한 교육이 필요했으므로 서기관은 학자이거나 관리였습니다. 구약 성경에서는 나라의 매우 높은 관리를 서기관이라고 했습니다(삼하8:17 ). 종교적인 율법이 유대인들의 생활에 점점 더 중요하게 된 포로기 이후 시대에는 전문 교육을 받고 임직한 유대교 학자들이 처음으로 등장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율법을 연구하고 해석하는 것이었습니다. 신약 시대의 율법학자들을 보통 '서기관'이라고 부르는데, 이들은 종교적으로 대부분 바리새인들이었고, 지도적인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우두머리들이었다.

 

바리새인들도 돈을 사랑하던 자였습니다. 이들도 온갖 계율로 백성들을 협박하여 돈을 갈취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에서 유명한 맘몬과 주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가리켜 맘몬을 섬기는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종이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이는 그가 이 주인을 미워하고 저 주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이 주인을 떠받들고 저 주인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당시 서기관으로 대변되는 바리새파는 당시 종교적 기득권 세력이었던 사두개파와는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습니다. 그들은 종교적 특권을 가진 사두개파와 다른 노선을 취하였습니다. 그러면 이들은 당연히 안나스 일족의 부정에 대해 분연히 일어나 개혁을 요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냥 둘 뿐만 아니라 저희들도 한 자리를 해 먹었습니다. 저희들만 어떻게 높은 자리를 차지해서 올라가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현실에 타협했습니다.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면서, 입으로는 사두개파를 공격하면서, 실제로는 사회가 바뀌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권리도 사라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교회의 타락을 보면서도 그에 편승해 자신들의 종교적인 이익과 권리를 위해 대제사장들과 공모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개혁자라고 생각하면서도 개혁할 의지가 없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개혁을 원하시는 예수님께 심한 위기감을 느꼈습니다. 이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옛날의 적도 오늘의 동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종교라는 이름으로 기생하는 위선자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타락한 종교에 순응한 자들입니다.

15a절을 다시 보십시오. “그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니라.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사고파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성전의 제물을 파는 자들도 있었지만, 사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안나스 가문을 욕하였습니다. 그들은 안나스 가문의 패악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들 중에서 어떤 소심한 저항이라도 일어나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서서히 안나의 가문의 패악에 면역이 되어 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편리함 때문에 그렇습니다. 돈을 더 주더라도 성전에 제물을 사면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성전에서 환전하는 편했습니다. 백성들은 편리함 속에서 점점 익숙해지자, 문제의식 자체를 가지지 못했습니다.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더욱더 그 시대의 영적인 어둠으로 빨려 들어갔습니다. 그들 스스로는 이를 깨우고 나올 수 없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시대에는 영적인 빛이 비추었습니다. 400년의 영적 암흑기 후에 예수님의 영적인 빛이 세상에 비추었습니다. 15세기 종교 개혁자들이란 희미한 빛이 세상에 비추었습니다. 백성들은 세상의 빛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Point II 개혁하는 신앙(v18b~19)

이는 모든 사람들이 그분의 가르침에 깜짝 놀랐으므로 그들이 그분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더라.”

 

예수님의 가르침에 깜짝 놀란 백성들

백성들은 언제부터인가 타락한 종교에 순응해 갔습니다. 이런 생각들이 사람들의 생각에 자리 잡을 때, 성전은 물건 파는 사람들과 환전상으로 잠식되어 갔습니다. 예수님의 성전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내용을 가르쳤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정황상 왜 예수님이 이런 일을 하셨고, 무엇이 잘못인지를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셨을 것입니다. 그 어디에도 듣지 못한 말씀들을 해 주셨을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있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가르침에 성전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에 놀랐다란 표현은 번개에 맞은 듯한 놀람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무엇가로 쳐서, 감각을 깨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마치 잠자고 있는 자를 깨우기 위해, 손으로 몸을 흔들어 깨우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은 마치 번개를 맞은 듯, 너무 놀랐습니다.

 

어떻게 신앙을 개혁할 것인가?

여기에 성도의 책임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야 합니다. 바른 말씀의 공급함을 통해 영적인 잘못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도가 교회에 왔다, 갔다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신앙은 성전 뜰만 밟다 가는 신앙입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수준에서 신앙생활에 만족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고, 천국에 가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구원 받은 자는 자라가야 합니다. 성장해야 합니다. 말씀의 공급함을 통해 시대의 악함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이란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는 악함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신앙을 자신의 행복 추구수준에서 만족하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바른 말씀의 도리를 깨닫고 놀라야 합니다. 주님께서 비춰 주시는 빛을 보고 눈을 떠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사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는 이 하나님의 거룩한 도리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령님의 조명하심 속에서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깜짝 놀라게 됩니다. 우리가 죄라고 여기지 않는 사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에서 벗어나 있는지를 알고, 깜짝 놀라게 됩니다. 그리고 돌이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경험을 하신 분들은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말씀에 민감하여져서 말씀을 통한 우리 주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개혁하는 신앙입니다. 이런 분들이 한 분, 두 분, 생겨날 때, 교회는 성장하게 되고, 개혁하는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경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의 결과

가는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과 소와 함께 그들을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자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비둘기 파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이것들을 여기서 가져가고 [아버지]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 하시니”(2:15~16)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일차 성전 정화 사건 때에 하신 말씀입니다. 이때는 예수님께서 채찍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폭력을 사용하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채찍을 통해서라도 돌이키기를 원하심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두 번째 성전 정화 사건 때 하신 말씀 보다 훨씬 경고의 강도가 낮습니다.

 

그러나 두 번째 성전 정화 사건 때는 채찍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강도의 소굴이라는 강한 표현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성전 정화 사건은 공생애를 시작한 직후, 예루살렘에서 유월절 전에 행하셨습니다. 두 번째 성전 정화 사건은 공생애를 마치기 직전, 유월절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3년의 기간이 유예 기간으로 주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들을 통해 변화를 기다리시는 기간이 3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기다려 주시는 분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후, 40년 간 이스라엘은 많은 고통과 슬픔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전국적으로 로마에 대한 항쟁이 일어났고,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가 아닌 자를 메시야라고 부르고 따랐습니다. 한 예로, 주후 132년에서 135년에 일어났던 바르 코크바란 자를 메시야로 따르다가 참혹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주후 70년 로마군들은 성전에다 불을 지렸습니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놓이지 않는 철저한 파괴를 경험해야 했습니다. 이후에 이스라엘은 2000년 동안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는 개혁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반응하지 않을 때, 가르쳐 주시고, 계시해 주시는 일에 무관심할 때, 그 결과는 징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70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그들의 영적 무관심과 돌이키지 않는 것에 대한 징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강도의 소굴예레미야

 

우리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계속해서 말씀해 주십니다. 가르쳐 주시고 계시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말씀에 대해 진지하게 반응하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게 여긴다면 우리 주님은 우리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징계를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영적인 무지에서 우리를 건져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세상의 악을 볼 수 있게 하시고, 교회 내의 불의를 보게 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잘못된 신앙에서 돌이켜, 거룩한 도리를 깨달아 그 도리를 실천해 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주 안에서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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