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말씀은 세 가지 사건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세 사건의 공통된 단어는 “구원”입니다.
구원을 이루기 위해 각 사건은 예수님과 믿음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구원을 위해 어떤 열정을 보였는가?
또한 어떤 믿음과 열정으로 구원을 얻게 되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각 사건마다 구원을 위한 믿음과 열정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구원을 위한 믿음과 열정
1. 구원 사역을 위한 예수님의 열정 (31)
구약의 메시아에 대한 대언은 초림과 재림으로 나뉩니다.
초림의 메시아는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재림의 메시아는 영광스럽게 이 땅에 오셔서 온 땅을 다스릴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초림의 메시아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죽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많은 대언들이 있습니다(창세기 3:15; 시편 22; 시편 41~49; 이사야 53; 스가랴 9:9; 11:11~12)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인들의 생각에 자신의 삶을 맞추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초림의 대언을 성취하시기 위해 기꺼이 예루살렘으로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열정은 구원을 위해 고난과 죽음을 감수하시는 것에 있었습니다. 구약 성경의 많은 대언들이 예수님의 초림에 대한 것이었고, 예수님은 이러한 대언을 성취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구원을 향한 열정입니다.
2.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열정(32~34)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메시아의 초림의 사역을 가르치셨습니다.
메시아, 예수님은 이방인에게 넘겨져 채찍에 맞고, 모욕을 당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부활하십니다.
이는 그 백성을 죄의 사면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에서만 여러 번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제자들에게 가르치셨습니다. (누가복음9:20~31; 9:43~45; 13:33~35; 17:24~25)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심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우리는 제자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다 유대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유다이즘에 영향을 받고 자라왔습니다.
제자들은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이 지금을 깨닫지 못하지만, 깨닫는 시기가 있을 때가 있을 것이라는 비전을 가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고 구원의 사역을 위해 헌신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구원의 계획을 가르치셨으나 그들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깊은 사랑과 인내심으로 제자들을 가르치셨고, 그들의 이해를 기다렸습니다. 이는 구원을 위한 열정적인 사역이었습니다.
3. 메시아를 기다리는 열정(18:35~43)
맹인 “바디매오”의 예
예수님께서 여리고에 가까이 오실 때에 길에서 구걸하는 어떤 남자가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0:46절에 따르면, 그의 이름은 “바디매오”입니다.
그는 아마도 “나사렛 예수님” 관해 들어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나사렛 예수님”이 지난 가신다는 말을 듣자, 바로 “다윗의 자손이여, 내게 긍휼을 베푸소서” 라고 큰 소리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다윗의 자손”의미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다윗의 자손으로 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무엘하7:12, 이사야 11:1)).
또한, 메시아가 오시면 어떤 사역을 할 지에 대해서도 백성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사야 61:1~2; 누가복음 4:18).
누가복음 4:18절에 의하면, 메시아의 사역 중의 하나는 눈먼 자들이 시력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자손”는 메시아의 이름입니다.
“긍휼”을 요청하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것입니다.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더 소리쳐 예수님을 부름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맹인은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나사렛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 메시아라고 인정하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메시아를 부를 기회가 왔을 때에, 힘껏 소리쳐 불렀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제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굴하지 않고 더욱더 소리쳐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시력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 영혼에 구원을 주셨습니다(42).
“바디매오”의 구원을 위한 믿음과 열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 관한 소문을 듣고 예수님은 메시아로 인정하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맹인이 다 믿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들려지는 사건들을 듣고 생각하고, 고민하며, 기도하면서, 차츰 그의 믿음이 쌓여가고, 커져 갔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찾아왔을 때, ‘사람들의 제지’라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가 자신의 소원을 아뢰었다는 것입니다.
“삭개오의 예”
두 번째 메시아를 기다리는 예는 19장 1~10절의 삭개오의 예입니다.
삭개오는 세리들의 우두머리입니다.
세리들은 세금 징수원입니다.
한 해의 세금이 로마에 의해 경매로 부쳐지면, 세금을 징수할 권리를 획득하여 유대인들에게 세금을 징수하여 로마에 바쳤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대가까지 합쳐져 징수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세리는 유대백성들에게 원망과 질타를 당하는 그룹이었습니다.
비록 동족들에게는 민족의 배신자로 낙인찍혔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부자였습니다.
사람들은 돈을 추구합니다.
돈이 자신을 보호하고 행복해 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부자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에게 채워지지 않는 부족함이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였습니다.
”보고자 하되“의 의미
“보고자 하되”의 그리스어 단어 ζητέω(제테오)는 어떤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 끝까지 조사한 것을 의미합니다.
어떤 문제를 파고 들어 그 바닥까지 이른다는 의미입니다.
알때까지 조사하고 또 조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보고자 하되“의 시제
“보고자 하되”의 시제는 어떤 사건이나 행위가 반복적, 습관적으로 일어나는 의미를 가진 ‘과거형’시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시제를 근거로 할 때, “삭개오”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하고, 고민하고,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예수님에 대해 알고자 했습니다.
‘세리 마태를 제자 삼으신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라 말인가?
‘세리들과 창녀들의 친구가 되신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예수님은 누구이신가?’
아마도 “삭개오”는 많은 생각과 고민을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던 차에, 예수님게서 여리고를 지난 가신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습니다.
“삭개오”에게 있던 장애물은 그가 키가 작다는 것입니다.
삭개오는 이런 자신의 육체적 장애물을 극복하고자 창의적인 방법을 생각해냈습니다.
뽕나무에 올라가 예수님을 보고자 했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이미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신적인 능력으로 삭개오가 어떤 고민을 하는 지, 어떤 간절한 소원을 가졌는지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 주셨습니다.
“삭개오”의 구원을 향한 열정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자 하는 열정입니다.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하고 예수님께 나가는 믿음입니다.
맹인 바디매오와 삭개오는 예수님을 기다리면서 자신들의 믿음과 열정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찾고자 하고, 자신들의 장애물을 극복하여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열정적인 믿음으로 그들은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보여준 구원을 위한 믿음과 열정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믿음과 열정을 통해 우리도 구원을 받고, 주변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