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8

경계를 넘으신 하나님의 아들

누가복음 3:23–38

서론

족보는 건너뛰고 싶은 본문입니다.

이름이 77개입니다. 대부분 처음 듣는 이름들입니다. 읽다 보면 어느새 눈이 흐려집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목록을 세례와 광야 시험 사이에 놓았습니다. 의도 없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이 족보는 단순한 혈통 기록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민족의 경계, 저주의 경계, 실패의 경계를 넘어 우리 인간의 역사 속으로 내려오신 구원의 여정을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지금부터 그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Point 1 — 하나님의 아들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누가복음 3장 23절에는 이상한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 요셉의 아들이니…" 누가는 왜 단순히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고 "사람들이 아는 대로는"이라는 단서를 달았습니까. 이 단서가 이 족보 전체를 읽는 첫 번째 열쇠입니다.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과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사이에 간격이 있습니다. 누가는 그 간격을 의식하면서 이 족보를 기록합니다. 그렇다면 누가가 이 족보를 통해 보여 주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이것입니다. 이 아들은 유대인만의 아들이 아닙니다.

왜 누가는 아브라함이 아니라 아담까지 가는가?

마태복음은 첫 줄부터 선언합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마 1:1). 마태는 족보를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예수까지 내려옵니다. 왜 아브라함입니까.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창 12:3). 마태는 그 약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유대인 독자에게 증명하려 합니다. 마태의 족보는 언약의 성취를 향해 내려오는 족보입니다.

누가는 반대 방향으로 갑니다. 예수에서 시작하여 위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브라함을 지나칩니다. 노아를 지나칩니다. 셋을 지나칩니다. 그리고 멈추지 않습니다. "아담, 곧 하나님의 아들"까지 올라갑니다. 왜입니까. 아담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아닙니다. 아담은 모든 인류의 조상입니다.

두 복음서의 대조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나란히 놓으면 이렇습니다.

마태는 아브라함에서 출발하여 예수에게로 내려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예수 안에서 완성됩니다. 언약 백성을 향한 메시아의 도착입니다.

누가는 예수에서 출발하여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예수의 뿌리가 이스라엘을 넘어 온 인류에게 닿습니다. 모든 민족을 향한 구주의 선언입니다.

마태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가 우리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아입니까. 누가가 묻는 것은 이것입니다. 예수가 아담 이후 모든 인류가 필요로 하는 구주입니까. 두 질문은 모순이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의 질문이 더 넓습니다. 이스라엘의 경계 밖까지 나갑니다.

이것이 누가복음 전체의 시선인가?

그렇습니다. 누가는 처음부터 끝까지 이 시선을 유지합니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노래합니다(눅 2:32). 예수는 나사렛 회당에서 엘리야와 엘리사가 이방인에게 보내심을 받았음을 선포하십니다(눅 4:25–27). 사도행전은 "땅 끝까지"(행 1:8)로 끝납니다. 누가의 족보는 그 시선의 출발점입니다. 아담까지 올라가는 것은 선언입니다. 이 복음은 유대인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나는 이 족보 안에 있는가?

있습니다. 아담의 후손이라면 누구든 이 족보 안에 있습니다. 마태의 족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누가의 족보는 그 경계 밖의 모든 사람에게 말합니다. 당신도 이 구원의 대상입니다. 예수는 유대인만의 메시아가 아니라 아담의 모든 후손을 위한 구주로 내려오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구원의 대상입니다.

Point 2 — 하나님의 아들은 저주와 단절의 경계를 넘어 인간 역사의 매듭 속으로 들어오셔서 통과하셨습니다

누가는 족보를 시작하면서 이상한 단서를 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요셉의 아들이니." 단순히 요셉의 아들이라고 하면 될 것을 왜 굳이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이라고 했습니까. 누가는 처음부터 독자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입니다. 이 족보에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표면 아래에 하나님의 정밀한 설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 설계를 지금부터 들여다보겠습니다.

왜 요셉의 아버지가 마태에서는 야곱이고 누가에서는 헬리인가?

마태 1:16은 "야곱은 요셉을 낳았다"고 합니다. 누가 3:23은 요셉이 "헬리의 이상"이라고 합니다. 같은 사람의 아버지가 왜 다릅니까. 이것은 성경의 모순입니까.

아닙니다. 가장 오래된 설명은 계대결혼입니다. 신 25:5–6의 율법에 따라 헬리가 자식 없이 죽자 형제 야곱이 그 아내를 취하여 낳은 아들이 요셉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법적으로 헬리의 아들이고 혈통으로는 야곱의 아들입니다. 마태는 혈통을, 누가는 법적 관계를 따랐습니다.

또 다른 견해가 있습니다.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유대 관습에서 아들 없이 딸만 있는 경우 사위를 법적 아들로 취급하는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 경우 누가의 족보는 요셉의 혈통이 아니라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실제 혈통을 따른 것이 됩니다. 이 견해는 이어지는 논점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왜 누가는 솔로몬이 아니라 나단을 따르는가?

마태의 족보는 다윗 → 솔로몬으로 이어집니다. 누가의 족보는 다윗 → 나단으로 이어집니다. 나단은 솔로몬의 형제, 다윗의 또 다른 아들입니다. 왜 누가는 왕위 계열인 솔로몬이 아닌 나단을 따릅니까.

여기서 렘 22:30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솔로몬 계열의 왕 여고냐에 대해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이 사람을 자식 없는 자 같이 기록하라. 그 자손 중 다윗의 위에 앉아 유다를 다스릴 자가 다시는 없으리라." 솔로몬 → 여고냐로 이어지는 계열에 왕위 단절의 저주가 선언된 것입니다.

마태의 족보는 이 여고냐를 통과합니다. 그러면 마태의 족보는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마태는 여고냐를 알면서 넣었습니다. 렘 22:30은 당시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본문입니다. 마태의 목적은 왕위 계승권이었습니다. 예수가 다윗의 합법적 왕위 계승자임을 증명하기 위해 솔로몬 → 여고냐 → 요셉의 계보가 필요했습니다.

누가의 족보는 처음부터 나단을 따름으로써 여고냐 저주와 무관한 계열을 갑니다. 헬리가 마리아의 아버지라는 견해를 따르면 누가의 족보는 마리아를 통한 예수의 실제 혈통이며 여고냐 저주를 처음부터 우회합니다.

그러면 여고냐 저주는 어떻게 되는가?

동정녀 탄생이 이 매듭을 풉니다. 여고냐 저주는 혈통을 통해 전달됩니다. 요셉은 예수의 법적 아버지이지 생부가 아닙니다. 저주는 혈통을 타고 오지만 혈통이 끊겼으므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법적 부자 관계를 통한 왕위 계승권은 유효하게 예수에게 귀속됩니다.

두 족보는 모순이 아니라 하나님의 설계의 두 측면입니다.

마태의 족보(솔로몬 → 여고냐 → 요셉) → 법적 왕위 계승권 확보

누가의 족보(나단 → 헬리 → 마리아) → 실제 혈통, 여고냐 저주 우회

동정녀 탄생 → 이 두 요건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하나님의 방법

마태는 묻습니다. 예수가 다윗의 합법적 왕위 계승자입니까. 솔로몬 계열 족보로 답합니다. 누가는 묻습니다. 예수가 저주 없는 다윗의 실제 혈통입니까. 나단 계열 족보로 답합니다. 두 복음서를 나란히 읽을 때 비로소 이 전체 그림이 보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역사의 매듭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것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여고냐의 저주도, 두 족보의 긴장도,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 평범한 외모도—하나님은 그 어느 것도 밖에서 제거하지 않으셨습니다. 안으로 들어오셔서 통과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족보가 증언하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역사가 아무리 복잡하고 끊어진 것들로 가득하다 해도, 우리는 이미 그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아들 앞에 서 있습니다.

Point 3 — 하나님의 아들은 아담의 실패가 만들어 낸 경계를 넘어 순종하심으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족보의 마지막 이름은 아담입니다. 누가는 거기서 멈춥니다. "아담, 곧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바로 다음 장면에서 마귀가 예수에게 묻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가는 첫 번째 하나님의 아들 아담과 참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족보라는 다리로 연결한 뒤, 그 다리 위에서 질문을 던집니다.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왜 족보는 아담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가?

누가의 족보는 "아담, 곧 하나님의 아들"로 끝납니다(눅 3:38). 아담은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신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하나님의 아들은 시험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그 실패로 죄와 사망이 모든 인류에게 들어왔습니다(롬 5:12). 누가는 족보를 아담에서 끝냄으로써 독자에게 이 무게를 지웁니다. 예수 앞에는 실패한 아담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왜 누가는 족보를 세례와 광야 시험 사이에 놓는가?

세례에서 하나님이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눅 3:22).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선언하신 바로 그 아들 앞에 누가는 즉시 족보를 놓습니다. 그리고 족보가 끝나자마자 광야 시험이 시작됩니다. 마귀가 묻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에 마귀가 정면으로 도전합니다.

누가는 이 배치를 통해 독자에게 말합니다. 이 족보를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세례의 선언과 광야의 도전 사이에 이 족보가 있는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족보의 마지막 이름 아담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렸지만 시험 앞에서 실패했습니다. 예수는 그 실패한 아담과 족보로 연결된 채 광야로 나가십니다. 아담은 동산에서 실패했습니다. 예수는 광야에서 순종하십니다. 아담은 먹는 것으로 넘어졌습니다. 예수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려 했습니다. 예수는 하나님께 복종하십니다.

세례의 선언과 광야의 도전 사이에서 족보는 묻습니다. 첫 번째 아담이 실패한 그 자리에서 이 하나님의 아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누가의 서술 방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누가는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요셉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 예수는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세례에서 선언하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누가는 독자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예수를 누구라고 봅니까. 사람들처럼 요셉의 아들로 봅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선언하신 참 하나님의 아들로 봅니까. 광야 시험은 그 답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의 눈에 평범해 보였던 예수는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순종하심으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첫 번째 하나님의 아들이 실패했기에 죄와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참 하나님의 아들이 실패하지 않으셨기에 우리에게 구속의 길이 열렸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의 순종이 아닙니다. 아담이 실패한 자리에서 실패하지 않으신 참 하나님의 아들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실패한 인류에 속하지만, 새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의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결론

누가의 족보는 이름의 목록이 아닙니다. 구원의 여정을 증언하는 기록입니다.

이 족보의 첫 번째 이름은 예수입니다. 마지막 이름은 아담입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실패와 정죄와 죽음의 역사를, 예수께서 그 안으로 들어오심으로 뒤집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민족의 경계를 넘어 아담의 모든 후손에게로 내려오셨습니다. 저주와 단절의 경계를 넘어 인간 역사의 매듭 속으로 들어오셔서 통과하셨습니다. 아담의 실패가 만들어 낸 경계를 넘어 순종하심으로 참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길고 낯선 이름들의 목록은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모든 경계를 넘어 우리에게로 내려오셨다는 복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