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5.24

반드시 하신 그 일을 간직하라

누가복음 2:40~52

서론: 잃어버린 예수님?

예루살렘의 유월절 절기가 끝났습니다. 수천 명의 순례자들이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그 행렬 속에 있었습니다. 친족들과 지인들과 함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아도 친족들 틈에 끼여 오겠거니 생각했습니다.

하루를 걸었습니다. 저녁이 되어 일행이 멈추었을 때, 비로소 예수님이 없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다음 날 아침 오던 길을 거슬러 다시 예루살렘을 향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날,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사흘 뒤에 그분을 성전에서 발견하였는데 그분께서 박사들 한가운데 앉으사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시며 그들에게 문제들을 묻기도 하시더라." (v.46)

유월절마다 성전 뜰에서는 랍비들의 공개 토론이 열렸습니다.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무엇을 가리키는가, 고난받는 종은 누구인가, 메시아는 언제 오시는가. 바로 그 자리에 열두 살 예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듣고, 묻고, 답하셨습니다.

"그분의 말을 들은 자들은 다 그분께서 깨닫고 답변하시는 것들로 인하여 깜짝 놀라더라." (v.47)

헬라어 ἐξίστημι — 제정신을 잃을 만큼 놀랐다는 뜻입니다. 수십 년 이 본문들을 씨름해온 전문가들이 열두 살 소년 앞에서 그랬습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설명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힐난과 예수님의 교정

바로 그때 마리아가 도착했습니다.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사흘을 찾아다닌 어머니의 공포와 안도와 분노가 한꺼번에 쏟아졌습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단순한 해명이 아니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v.49)

이것은 마리아의 인식을 바로잡는 교정이었습니다. 나는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δεῖ)" — 이것은 선택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존재하시는 이유 자체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님의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 첫 마디 안에 이미 이 땅에 오신 목적 전체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v.50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그분의 어머니는 이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니라." (vv.50–51)

요셉과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한 채로도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간직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그분이 반드시 하신 그 일을 간직하고 있습니까?

본론 1: 반드시 하실 내 아버지의 일

마리아가 간직한 "이 모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반드시 하셔야 했던 그 일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일"로 번역된 헬라어 원문은 ἐν τοῖς τοῦ πατρός μου입니다. τοῖς는 중성 복수 정관사입니다. 뒤에 명사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집입니까, 일입니까, 뜻입니까. 번역마다 다릅니다. 어떤 한 단어도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장소로서의 성전을 넘어, 예수님의 모든 삶과 생각과 호흡이 아버지의 주권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 "아버지의 것"과 "내 것"은 구분되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이 "반드시(δεῖ)"라는 단어를 누가복음 전체에서 반복합니다. 세 방향으로 펼쳐집니다.

① 사명 — 왜 오셨는가

"나는 반드시 다른 동네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다." (4:43)

예수님은 왜 오셨는지 아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는 것,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② 고난 — 어떻게 가시는가

"인자가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한다." (9:22)

한 번이 아닙니다. 13장, 17장, 22장, 24장에서 같은 단어가 반복됩니다. 이것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정해진 길이었습니다. 열두 살의 반드시가 겟세마네를 지나 골고다까지 이어집니다.

③ 완성 — 어디까지 가시는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 아니냐." (24:26)

부활하신 예수님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δεῖ가 과거형 ἔδει로 바뀝니다. 십자가가 지나간 자리에서 돌아보며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했다. 그리고 이루어졌다." 부활과 영광까지가 그 반드시의 완성이었습니다.

반드시는 이 세 방향을 처음부터 품고 있었습니다. 왜 오셨는지(사명), 어떻게 가실지(고난과 십자가), 어디까지 가실지(부활과 영광).

그리고 이 모든 반드시의 끝에 우리가 있습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충동이 아닙니다. 열두 살부터 이미 반드시였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된 것이었습니다.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엡 1:4)

열두 살 성전에서 "반드시"라고 하신 분이, 사실은 창세 전부터 이미 우리를 위한 그 길 위에 계셨습니다.

본론 2: 마음속에 간직하니라

마리아는 몰랐습니다. 그 반드시가 어디로 향하는지. 아버지의 것들이 무엇인지. 열두 살 아들의 첫 마디가 이미 십자가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분의 어머니는 이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니라." (v.51)

간직하다 — διετήρει. 두 부분으로 이루어진 단어입니다. διά는 "끝까지, 완전히, 관통하여"를 뜻하고, τηρέω는 "지키다, 보존하다, 파수하다"를 뜻합니다. 합치면 "끝까지 완전하게 지켜내다"입니다. 시제는 미완료(Imperfect)입니다. 한 번 간직한 것이 아닙니다. 한 순간의 결단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반복적으로, 날마다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이해하지 못했지만 간직했습니다

마리아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흘려보내지 않았습니다. 다 알고 나서 붙든 것이 아닙니다. 모르는 채로 붙들었습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완전히 이해해서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분의 말씀이라면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의지로 붙드는 것입니다. 한 번의 결단이 아닙니다. 날마다 반복적으로 능동적으로 붙드는 것입니다.

간직함이 마리아를 데려간 곳

그 간직함은 마리아를 어디까지 데려갔습니까.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더라." (요 19:25)

마리아는 십자가 곁에 있었습니다. 열두 살 아들의 그 "반드시"가 여기서 완성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것이었구나. 그 반드시가 여기였구나."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행 1:14)

열두 살 성전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마리아가, 다락방에 있습니다. 기도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간직함이 마리아를 십자가 곁으로, 그리고 다락방까지 데려갔습니다.

적용: 다시 돌아와 십자가를 상기하다

우리는 왜 그 많은 은혜를 경험하고도 잠시 후 잊어버립니까.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바빴습니다. 힘들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들었던 메시지가 희미해졌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쁜 일상에서 복음을 잠시 잊어버립니다. 힘든 현실에 매몰되어 세상 가치관에 떠내려가는 우리를 발견합니다. 오래 믿은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조건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마리아를 깨웠습니다

"알지 못하셨나이까?" 헬라어 ᾔδειτε. 과거완료입니다. "지금 모르느냐"가 아닙니다. "그 많은 대언의 메시지들을 들으셨는데, 그것이 지금 이 순간 살아있지 않습니까?" 마리아는 그 순간 깨어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간직했습니다. 더 깊이. 더 단단하게.

우리도 자꾸 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 앞에서 다시 깨어날 수 있습니다. 마리아처럼 다시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있습니다

유월절은 구원을 기억하는 절기입니다. 마리아는 매년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공동체와 함께, 절기에 맞춰, 반복적으로. 그 반복 안에서 말씀을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유월절이 예배입니다. 성도는 바쁜 일상에서 복음을 잠시 잊은 채로 예배에 옵니다. 그리고 다시 상기합니다. 다시 간직합니다. 또 한 주를 살다가 다시 옵니다. 또 선포됩니다. 또 간직합니다. διετήρει — 미완료입니다. 반복입니다. 계속입니다. 이것이 예배의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하십시오

이 설교의 중심은 우리의 신실함이 아닙니다. 그분의 신실함입니다. 마리아가 잊어도 예수님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살부터 시작된 그 반드시를,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잊어버리는 동안에도, 끝까지 지키셨습니다. 십자가까지. 부활까지.

"우리가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항상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딤후 2:13)

우리가 잊어도 그분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 신실하심이 우리가 다시 붙들 수 있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결론

마리아는 몰랐습니다. 그러나 간직했습니다. διετήρει — 날마다 반복적으로. 그리고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십자가 곁에서도, 부활 후에도, 다락방까지.

우리도 모릅니다. 십자가의 깊이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마리아도 몰랐습니다.

바쁘고 지친 삶 속에서 복음을 잊어버릴 때마다, 다시 예배의 자리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이 말씀을 다시 들으십시오.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우리가 잊어도 그분은 잊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살부터 시작된 그 반드시를 십자가까지 이루셨습니다. 간직함의 끝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우리의 간직함도 그리로 향합니다.

그러므로 간직하십시오. 반드시 하신 그 일을 날마다 다시 붙드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