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 자만이 보았다
서론
예루살렘 성전에 한 아기가 들어왔습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율법의 규례대로 데려온 아기였습니다. 21절을 보면 이름은 예수였습니다. 22-24절을 보면 부모는 정결 예식을 위해 비둘기 두 마리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가난한 자의 제물이었습니다.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집안의 평범한 아기였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성전 배경 안에 배치합니다. 성전은 당시 유대 종교의 심장부였습니다. 성경을 가장 많이 아는 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메시아를 가장 먼저 알아보아야 할 자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아무도 이 아기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많은 지식과 경험과 종교적 권위를 가진 자들이 보지 못한 것을, 두 사람이 보았습니다. 시므온과 안나였습니다.
누가는 왜 이 대조를 여기에 배치했습니까. 오늘 본문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어디서 옵니까.
I. 보아야 할 자들이 보지 못했다
누가복음 2장에서 예수님이 성전에 오셨을 때, 성전 안의 종교 지도자들은 아무도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기 있었습니다. 성경을 알았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서기관들은 권위를 문제 삼습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 바리새인들은 안식일 위반을 지적합니다.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 대제사장들은 권세의 출처를 따집니다. 아는 자들이 보지 못합니다.
왜입니까.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성경을 외웠습니다.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알았습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으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고전 2:14)
성령이 없었습니다. 성경 지식이 성령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종교적 지위가 성령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지식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II. 기다린 자들은 보았다
시므온 — 성령이 세 번 언급된다
누가는 시므온을 소개하면서 성령을 세 번 언급합니다. 25절 — 성령이 그 위에 계셨습니다. 26절 — 성령이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7절 —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누가는 의도적으로 세 번 반복합니다. 시므온이 아기를 알아본 것이 그의 탁월한 영적 통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이 이끄셨습니다. 성령이 계셨고, 성령이 말씀하셨고, 성령이 데려가셨습니다. 그 자리에서 보았습니다.
시므온이 품에 안은 것은 초라한 아기였습니다. 외적으로는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눅 2:30-32)
성령이 여신 눈으로 보면 이것이 보입니다. 초라한 아기가 아니라 만민의 구원이 보입니다. 이방을 비추는 빛이 보입니다. 이스라엘의 영광이 보입니다. 성령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안나 — 84년의 기다림
안나는 누가가 신약에서 유일하게 여대언자라는 칭호를 붙인 사람입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상실로 시작됩니다. 결혼 7년 만에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 이후 84년을 홀로 살았습니다. 사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84년이었습니다. 그 기다림이 끝나는 날이 왔습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 (눅 2:38)
안나는 보았습니다. 그리고 멈출 수 없었습니다.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헬라어 ἐλάλει — 미완료 시제입니다. 계속해서,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말했습니다. 84년의 기다림이 그녀를 증인으로 만들었습니다.
III. 성령은 기다린 자에게 여신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먼저 정리해야 합니다. 기다림이 성령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기다림의 양과 질이 성령의 임재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역사하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시므온과 안나의 기다림은 무엇이었습니까. 성령께 자신을 열어두는 자세였습니다. 시므온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였습니다(25절). 안나는 성전을 떠나지 않고 밤낮으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기다림의 방향이 하나님의 약속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기다림의 구체적 모습 — 세 가지
그러면 오늘 우리에게 기다림은 어떤 모습입니까.
첫째, 말씀 앞에 머무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이사야의 예언을 붙들고 살았습니다. 성경이 약속한 구원을 놓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은 추상적인 소망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말씀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바쁜 하루 속에서 말씀 앞에 멈추는 시간을 내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서 성령이 말씀하십니다.
둘째, 기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안나는 밤낮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요구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 향하는 행위입니다. 오늘 우리가 무릎을 꿇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기도하는 자리에서 성령이 우리의 눈을 여십니다.
셋째, 예배 공동체 안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므온은 혼자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성전이라는 공동체 안에 있었습니다. 안나도 성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기다림은 고독한 개인의 수행이 아닙니다. 함께 모여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공동체의 행위입니다. 우리가 매주 이 자리에 모이는 것이 바로 그 기다림의 모습입니다.
"이는 너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음이라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롬 8:24–25)
기다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해 마음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말씀 앞에 머물고, 기도로 마음을 열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바라보는 것 — 이것이 성령이 역사하시는 자리입니다.
결론
시므온은 평생을 기다렸고, 단 한 번에 알아보았습니다. 안나는 84년을 기다렸고, 그 아기 앞에서 멈추지 못했습니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그 기다림 속에서 눈을 여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같은 자리에 서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해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알아도 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지식이나 경험에서 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 앞에 멈추는 자, 기도로 마음을 여는 자, 공동체 안에서 함께 기다리는 자 — 그 자리에서 성령이 역사하십니다. 시므온이 본 것을 보게 됩니다. 안나가 말한 것을 말하게 됩니다.
메시아를 알아보는 눈은 성령이 여시고, 기다림이 준비한다.
기다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말씀 앞에 계속 머무십시오. 기도의 자리를 지키십시오. 이 공동체 안에서 함께 바라보십시오. 성령께서는 반드시 그 기다림 속에서 일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