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이미 들으셨다
서론
누구에게나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습니다. 그 기도 제목을 놓고 오래 기도했지만 바뀌는 것은 없습니다. 객관적 상황이 더 이상 기도할 힘을 잃게 합니다. 오래 기다렸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응답해 주지 않습니다. 오늘 누가복음 1장의 사가랴 부부가 바로 이 경우입니다.
때는 유대 왕 헤롯의 시대입니다. 헤롯은 이스라엘의 오랜 원수였던 에돔 사람의 후손이었습니다. 로마에 줄을 서서 권력을 얻은 자였습니다. 이방인의 피를 가진 자가 다윗의 왕좌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민심을 달래려 성전을 화려하게 지었지만,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것이라면 어린 아기들도 죽이는 자였습니다. 로마의 착취와 헤롯의 과도한 세금이 겹치면서 백성들의 삶은 빈곤과 피폐의 끝에 몰려 있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무력으로 저항하려 했고, 어떤 이들은 율법 안으로 숨었고, 어떤 이들은 광야로 떠났습니다. 나라는 산산이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습니다. 말라기 이후 400년, 선지자도 없었습니다. 계시도 없었습니다. 백성들의 삶이 가장 빈곤하고 압제가 가장 극심하며 슬픔이 가장 깊어졌을 때, 메시아를 향한 대망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기대가 아니었습니다. 살아남기 위한 절박한 외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우리를 잊으신 것인가.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 질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시대, 한 제사장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사가랴. 아비야 계열의 제사장이었고, 부인 엘리사벳은 아론 계열의 딸이었습니다. 이들 부부는 "주의 명령과 규례 안에서 흠이 없는 의로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부에게도 간절한 기도 제목이 있었습니다. 부인 엘리사벳이 잉태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습니다. 제사장 가문이기에 대가 끊기는 것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라 사명을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는 아비야 반차에 속한 제사장이었습니다.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수많은 제사장들을 24개의 반차로 나누었습니다. 각 반차는 일 년에 두 차례, 안식일부터 다음 안식일까지 일주일간 성전에서 섬겼습니다.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차는 그 중 여덟 번째였습니다.
그 일주일 동안, 분향단에서 향을 피울 단 한 명을 제비뽑기로 결정했습니다. 한 반차 안에 수십 명의 제사장이 있었으니, 평생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기회였습니다. 어떤 제사장은 평생 이 제비에 뽑히지 못한 채 직무를 마치기도 했습니다. 그 제비가 사가랴에게 떨어졌습니다. 우연이었을까요? 요행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제비뽑기 안에 보이지 않게 개입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우연처럼 보이는 일 속에, 하나님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사가랴가 성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분향단 앞에 서서 향을 피웁니다. 구약에서 향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었습니다. 향이 타오르며 연기가 위로 올라가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도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고백합니다.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분향함과 같이 되며."(시 141:2) 사가랴가 향을 피우는 이 순간은, 이스라엘의 기도가 하나님 앞에 올려지는 순간입니다. 밖에서는 백성들이 함께 기도합니다. 400년의 탄식이 향 연기에 실려 하나님 앞으로 올라갑니다.
바로 그 순간, 천사 가브리엘이 분향단 오른편에 섭니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느니라."
이 한 마디가 400년의 침묵을 깨뜨렸습니다. 그런데 이 선언은 단순히 기도 응답의 소식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선언입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400년을 침묵하신 하나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본론 1.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구속사를 멈추지 않으셨다
— 제비뽑기 안에 하나님의 손이 있었다
400년의 침묵.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하나님이 자리를 비우신 것입니까? 백성들의 탄식을 외면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침묵은 부재가 아니었습니다.
제비뽑기를 보십시오. 수십 명의 제사장 중에 사가랴가 뽑혔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우연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에는 우연이 없습니다. 잠언은 말합니다.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 하나님은 그 제비뽑기 안에 이미 들어와 계셨습니다. 400년 동안 침묵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은 단 한 순간도 역사 밖에 계신 적이 없었습니다.
천사의 선언을 자세히 봐야 합니다. "들으셨느니라" — 헬라어로 εἰσηκούσθη(에이사쿠스테)입니다. εἰς(에이스) "안으로" + ἀκούω(아쿠오) "듣다". 단순히 소리를 접수한 것이 아닙니다. 깊이 안으로, 귀를 기울여 받아들이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동사는 aorist, 곧 완결된 사건을 표현하는 시제입니다. 지금 엘리사벳의 배는 여전히 닫혀 있습니다. 요한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이미 들으신 사건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시간에서는 400년 기다림이었지만, 하나님의 시간에서는 응답이 이미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침묵은 외면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구속사의 가장 정확한 순간을 향해 모든 것을 움직이고 계셨습니다. 사가랴의 이름이 제비에 뽑힌 그 날, 그 시간, 그 분향단 앞에 천사가 서도록 — 하나님은 400년 동안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본론 2. 하나님의 응답은 인간의 기도를 담되 반드시 그것을 초월한다
— 사가랴는 아들을 구했고 하나님은 선지자를 주셨다
천사의 선언을 들으십시오. "사가랴야."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민족의 기도를 들으시면서 동시에 이 한 사람의 가장 깊은 아픔을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두 층위를 동시에 관통합니다.
그런데 그 응답의 내용을 보십시오.
사가랴는 한 아이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시대를 바꿀 사람을 주셨습니다. 사가랴는 가정의 빈자리를 채워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사가랴는 제사장 가문의 대를 이을 아들을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 이사야가 예언한 그 목소리를 보내셨습니다.
사가랴는 몰랐습니다. 자기 부부의 기도가 400년 침묵을 깨는 기도였는지를. 자기 아들이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자가 될 것인지를. 한 가정의 눈물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통로가 될 것인지를. 그러나 하나님은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기도를 담으십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것을 넘어서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술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분은 우리보다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어디로 연결되는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알고 계십니다.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본론 3. 하나님은 인간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약속에 신실하시다
— 사가랴의 의심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막지 못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본문이 숨기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사가랴의 반응입니다.
천사의 선언을 들은 사가랴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이까 나는 늙고 아내도 나이가 많습니다."(눅 1:18) 의심했습니다. 천사 앞에서, 분향단 앞에서, 400년을 기다려온 그 자리에서 — 그는 흔들렸습니다.
누가는 이것을 감추지 않습니다. 사가랴는 완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는 의심했고, 그 의심의 대가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일하심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잉태했습니다. 요한은 태어났습니다. 구속사는 진행되었습니다. 사가랴의 불신이 하나님의 약속을 막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사가랴의 완전한 믿음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심 위에 세워진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벳은 훗날 고백합니다. "주께서 나를 살펴보시는 날들에 사람들 가운데서 내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이렇게 대우하셨다."(눅 1:25) "치욕"은 헬라어로 ὄνειδος(오네이도스), 구약 히브리어 חֶרְפָּה(헤르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헤르파는 단순한 개인적 슬픔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공개적으로 가해지는 사회적 수치, 하나님의 복에서 제외된 자라는 낙인입니다. 라헬이 아들을 낳은 후 "하나님이 나의 헤르파를 씻으셨다"(창 30:23)고 고백했을 때 바로 이 단어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의롭게 살았음에도 헤르파 속에 있었습니다. 수십 년을 기도했음에도 닫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사가랴는 천사 앞에서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여기서 기쁨이 옵니다. "너도 기쁨과 즐거움이 있겠고 많은 사람도 그가 남을 기뻐하리니."(눅 1:14) 누가복음의 기쁨은 인간의 믿음이 완성되어서 찾아온 기쁨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인간의 연약함과 불신을 뚫고 들어온 기쁨입니다. 그것이 누가복음이 선언하는 기쁨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신 곳에 반드시 기쁨이 따라옵니다. 그 기쁨의 근거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결론
하나님이 사가랴의 기도를 들으신 것은 단지 한 가정을 행복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그 아들 요한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준비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00년의 침묵은 외면이 아니었습니다. 구원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가장 큰 응답을 주셨습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침묵 중에도 구속사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의 기도를 담되 반드시 그것을 초월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가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셨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래된 기도를 안고 오신 분이 계십니까? 몇 년째 드리고 있는 기도. 눈물로 드렸던 기도. 어느 순간 포기해버린 기도. 이제는 하나님이 들으시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는 기도.
오늘 본문이 그 기도를 향해 말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보십시오. 그분은 400년을 침묵하시면서도 구속사를 멈추지 않으신 분입니다. 그분은 사가랴의 불신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분은 한 가정의 눈물을 구속사의 통로로 삼으신 분입니다.
사가랴에게 주신 그 말씀이 오늘 당신에게도 울려 퍼집니다.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주께서 네 기도를 들으셨느니라."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들으실 분이 아니라, 이미 들으신 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