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24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

63:1~11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내가 일찍 주를 찾되 물이 없는 메마른 땅에서 내 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오니” (시 63:1)

시편 63편은 유다 광야에서 기록되었다. 다윗은 광야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사울에게 쫓기던 때에도,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도망하던 때에도 그는 광야를 지나왔다. 이 시는 풍성함 속에서 쓰인 글이 아니다. 메마름과 결핍 한가운데서 쓰인 글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다윗의 첫 번째 관심이 광야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원수를 없애 주십시오”로 시작하지 않는다. “왕위를 회복하게 해 주십시오”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내 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사모하오니”라고 고백한다.

기억이 갈망을 낳는다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2절에 나온다.

“이것은 내가 성소에서 주를 뵈온 것 같이 주의 권능과 주의 영광을 보고자 함이니이다.” (2절)

광야에서 하나님을 찾는 이유는, 성소에서 하나님을 만났던 기억 때문이다. 다윗은 한 번도 하나님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성소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았던 사람이다. 그래서 광야에서 그가 그리워하는 것은 왕궁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새로운 체험을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다. 이미 성소에서 보았던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 이전에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현재의 갈망을 낳는다.

헤세드가 생명보다 낫다

다윗은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하리이다” (3절)

여기서 “인자하심”은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다. 단순한 친절이나 호의가 아니다. 언약 안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사랑이며, 내가 사랑받을 만해서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스스로 사랑하기로 결정하신 사랑이다.

다윗은 자신이 왜 하나님을 만났는지 알고 있었다. 자신이 특별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의로워서도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윗의 갈망은 자기 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헤세드를 경험한 사람의 갈망이다. 주의 사랑이 생명보다 낫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

광야 한가운데서 만족

이러한 갈망은 점점 만족으로 바뀐다.

“내 혼이 골수와 기름진 것으로 배부른 것 같이 만족하며” (5절)

환경은 변하지 않았다. 광야는 여전히 메마른데, 다윗의 영혼은 잔칫상에 앉은 사람처럼 풍성하다. 환경이 변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그의 만족이 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밤이 찾아온다.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밤중에 주를 묵상할 때에” (6절)

사람은 밤에 가장 약해진다. 외로움이 밀려오고 두려움이 커진다. 그러나 다윗은 밤마다 하나님을 기억한다. 이것은 의무적인 종교 행위가 아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생각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의 근거는 분명하다.

“주께서 나의 도움이 되셨사오니” (7절)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면 하나님께서 도우시지 않은 순간이 없었다. 사자의 발톱에서도, 골리앗 앞에서도, 광야의 도망 생활 속에서도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으셨다.

내가 붙든 것이 아니라

마침내 다윗은 이렇게 고백한다.

“내 혼이 주의 뒤를 바싹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떠받치시거니와” (8절)

“바싹 따른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달라붙다(דָבַק, 다바크)라는 뜻이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열심을 자랑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을 붙든다고 고백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의 오른손이 자신을 붙들고 있다고 말한다.

결국 다윗이 깨달은 것은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놓지 않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놓지 않으셨다는 사실.

광야는 내 신앙의 실력을 시험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가 얼마나 깊은지를 드러내는 곳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새로운 체험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먼저 베푸신 헤세드를 기억함으로써 그분 자신을 다시 목말라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오늘 우리의 삶도 메마르다. 채워지지 않는 관계의 소원이 있다. 지침이 있다. 불평하는 마음이 있다. 여기서 멈추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가?

다윗처럼 새로운 체험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다. 먼저 베푸신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여기까지 살아온 것이 내 힘 때문이 아니었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붙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계셨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다시 헤세드를 묵상하는 것이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지금도 의의 길로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기억이 갈망이 되고, 갈망이 찬양이 되며, 찬양이 만족이 된다.

시편 63편은 광야의 끝으로 마무리되지 않는다. 다윗은 여전히 광야에 있지만,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한다.

“오직 왕은 하나님을 기뻐하리이다” (시 63:11)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 안에서 기뻐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다. 광야가 끝나야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기쁨이 되실 때 광야 한가운데서도 만족할 수 있다.

“오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묵상을 위한 질문

1. 나는 하나님을 만났던 기억이 있는가? 그 기억이 지금의 갈망으로 이어지고 있는가?

2. 내가 하나님을 찾는 동기는 무엇인가? 상황의 해결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인가?

3. 헤세드—내 자격과 무관하게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를 오늘 어디서 경험하고 있는가?

4. 지금 나를 붙들고 계신 하나님의 오른손을 신뢰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