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6.13

동굴의 어둠 속에서

시편 57:1~11,

시편 57편의 표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동굴에 있을 때를 말합니다. 56편의 가드와는 다릅니다. 가드는 이방인의 땅이었지만, 이 동굴은 자기 백성의 땅 안에 있습니다. 그를 쫓는 것은 외국 군대가 아니라 자기 왕입니다. 도망칠 곳이 없을 때보다 더 막막한 게 있습니다. 도망쳐 들어간 곳마저 내 나라라는 것. 나를 위협하는 자가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동굴 안의 다윗

4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그립니다. "내 혼이 사자들 가운데 있으며 ... 그들의 이빨은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예리한 칼이로다." 여기서 "사자"는 실제 맹수가 아닙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가리키는 비유입니다. 무기도 칼이 아닙니다. 이빨과 혀입니다. 직접적인 위해가 아니라, 말입니다. 6절에서 적들은 그물을 준비하고 구덩이를 팝니다. 같은 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상태를 한마디로 말합니다. 내 혼이 눌렸다, 굽혀졌다. 풀이 죽었다는 말입니다.

여기까지가 동굴입니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말로 둘러싸이고, 혼이 눌리는 자리. 이 동굴은 8절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무엇이 마음을 확정하였는가

그런데 7절에서 다윗은 전혀 다른 말을 합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나콘(נָכוֹן)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태는 능동의 표현이 아닙니다. "내 마음이 세워진 상태에 있다"는 수동의 표현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견고한 것은 그가 의지로 세운 게 아닙니다. 무언가에 의해 "세워진 바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윗의 마음을 세웠을까요. 답은 7절에 없습니다. 답은 이미 1절에 있었습니다.

헤세드와 에메트로

시편은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라는 두 번의 간구로 시작합니다. 다윗이 구하는 것은 "이 동굴에서 나를 꺼내주소서"가 아닙니다. 자기 처지를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기댑니다.

여기서 그가 붙드는 것은 두 단어입니다. 헤세드(חֶסֶד)와 에메트(אֱמֶת).

헤세드는 흔히 "사랑"으로 옮깁니다. 그런데 이 사랑은 내가 잘해서 받는 사랑이 아닙니다. 맺어진 관계 때문에, 그 관계를 맺은 쪽이 끝까지 책임지는 사랑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이 자식의 행실에 따라 달라지지 않듯, 받는 자의 자격과 무관한 사랑입니다.

에메트는 "진리"로 옮기지만, 여기서는 "사실이다"보다 "흔들리지 않는다, 한결같다"는 뜻입니다. 어제 참되었던 것이 오늘도 똑같이 참됩니다.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둘을 합치면 이렇게 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 계시고, 그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사랑만 있다면 "오늘은 사랑하시지만 내일은 어떨지 모른다"는 여지가 남습니다. 변함없음만 있다면 "한결같지만 사랑인지는 모른다"는 여지가 남습니다. 두 단어가 함께 있을 때만 — 사랑하시고, 그 사랑이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 — 이 완성됩니다.

다윗이 동굴에서 가장 먼저 붙든 것이 이것입니다.

3절에서 다윗은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긍휼과 자신의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헤세드와 에메트가 "보내어지는" 것으로 그려집니다. 10절에서 같은 두 단어가 다시 등장합니다. "주의 긍휼은 커서 하늘들에까지 미치며 주의 진리는 구름들에까지 미치나이다." 이번에는 다윗이 받은 것을 직접 고백하며 그 크기를 노래합니다. 3절은 보내어진 것이었고, 10절은 그것을 보고 있는 자리입니다. 동굴 안의 한 사람에게 보내어진 사랑이, 하늘과 궁창을 가득 채울 만큼 컸다는 인식입니다.

이것이 7절의 답입니다. 다윗의 마음이 확정된 것은 동굴이 사라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동굴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굴 안에서나 밖에서나 변하지 않는 것 — 헤세드와 에메트 — 을 붙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견고해졌습니다.

그래서 8절의 그 유명한 구절이 가능해집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 나 자신도 일찍 깨리로다 ...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보통은 새벽이 와야 사람이 일어납니다. 다윗은 새벽보다 먼저 일어나, 도리어 새벽을 부릅니다. 동굴은 여전히 어둡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노래하는 대상 — 헤세드와 에메트 — 은 빛이 있든 없든 이미 사실입니다. 그래서 빛을 기다리지 않고 노래합니다.

9절에서, 동굴 안에서 시작된 찬양은 더 이상 개인의 고백에 머물지 않습니다. 만백성과 민족들 가운데로 퍼져 나갑니다.

이 시편은 정확히 같은 문장으로 두 번 끝납니다. "하나님이여 하늘들 위에 높임을 받으시며 주의 영광이 온 땅 위에 높이기를 원하나이다." 5절과 11절, 글자 하나 다르지 않습니다. 5절에서 이 말이 나올 때, 다윗은 여전히 그 동굴 안에 있었습니다. 마음의 확정도, 새벽을 깨움도 아직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때의 이 말은 캄캄한 처지 속에서 드려진 간구였습니다. 11절에서 같은 말이 다시 나옵니다. 다윗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말의 무게는 바뀌었습니다. 여전히 기도이지만, 이제는 헤세드와 에메트를 붙든 사람이 드리는 확신의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의 동굴에서

동굴은 다윗의 혼을 눌렀습니다. 그러나 동굴보다 더 큰 현실이 있었습니다. 헤세드와 에메트, 언약을 따라 사랑하시고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다윗은 동굴에서 이 하나님의 성품을 묵상하고 신뢰했습니다. 그래서 눌린 마음이 확정된 마음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동굴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동굴이 사라지지 않아도, 신뢰할 수 있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래서 마음이 세워집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첫째, 지금 나를 풀 죽게 만드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윗의 동굴처럼, 직접적인 해를 가하기보다 말로, 시선으로, 분위기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둘째, 그 동굴 안에서 내 마음은 무엇에 의해 "세워져" 있습니까? 내가 의지로 붙잡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나보다 먼저 있고 나보다 견고한 어떤 것에 의해 세워진 것입니까?

셋째, 헤세드와 에메트 —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성품 — 을 나는 지금 이 동굴 안에서도 사실로 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동굴 밖에 있을 때만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습니까?

넷째, 다윗은 새벽이 오기 전에 노래했습니다. 나는 지금,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리며 노래를 미루고 있습니까, 아니면 변하지 않는 것을 붙들고 오늘 노래할 수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