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말씀
우리는 지난 시간에 계시의 점진성과 그 과정에서의 우리의 믿음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계속해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 계시는 그 때, 아브람의 수준에서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이해한 범위에서 최선을 다 했습니다. 그의 종을 양자로 삼으려고 했습니다. 또한 이집트 여인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아브람은 자신이 이해한 편에서 최선을 다해 씨에 대한 언약을 지키려고 했지만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시고,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할 사명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해 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통해 우리의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완성해 가십니다. 하나님께는 결과도 중요하지만, 결과 못지않게 과정도 중요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의 상태, 영적인 이해력을 무시하고, 바로 결과로 점프해 가시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오해하고 실수를 범합니다. 아브람과 같이 하나님의 계시를 잘못 이해해 실수를 범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믿음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 실수하더라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이번 주 말씀
우리는 아브람의 하나님에 대한 신관이 점점 깊고 풍부해지고 있음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그 동안 아브람의 신관이 어떻게 발전되고 풍부해졌는지 복습해 보겠습니다.
“그가 아브람을 축복하여 이르되, 하늘과 땅의 소유주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사람 아브람에게 복이 있을지어다.”(창세기 14:19)
1. 지극히 높으신(엘 엘리온:El Elyon)
아브람이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메소포타미아 원정군을 뒤좇아 갈 때의 믿음은 바로 이 믿음이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수많은 우상들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달의 여신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그들의 신들과 비교도 될 수 없는 지극히 높으신 분이 바로 그가 믿고 신뢰하고 따르던 하나님이었습니다.
2. 하나님(엘로힘:Elohim)
이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이 세상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아브람이 소돔 왕에게 이르되, 내가 하늘과 땅의 소유주 되시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곧 {주}께 내 손을 드노니”(창세기 14:22)
3. 주(LORD:야훼)
아브람은 롯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에 멜기세덱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신관은 이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에서 ‘주’라는 개념이 추가가 되었습니다. ‘주’는 ‘스스로 계시는 자’란 의미입니다. 이 하나님은 구약의 이스라엘과 언약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8:56 “너희 아버지 아브라함은 나의 날 보기를 기뻐하다가 그 날을 보고 즐거워하였느니라, 하시니” 말씀을 통해, 아브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하였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는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이 나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니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창세기 17:1)
전능자(엘 샤다이: El Shaddai) + 하나님(엘로힘:Elohim)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 오셔서 자신을 전능자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이 전능자 하나님에 대해 배우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전능자 하나님
전능자(엘 샤다이: El Shaddai) 와 하나님(엘로힘:Elohim) 차이
우리는 이미 ‘엘로힘‘의 하나님은 창세기 1:1절에서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배웠습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도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이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엘로힘‘은 불신자나, 신자 모두에게 전능한 하나님이십니다. ’엘 샤다이‘의 하나님은 신자에게만 해당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과 언약한 것을 전능한 능력으로 이룰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전능한 하나님은 ’엘 샤다이‘의 하나님이십니다 .
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을 “전능자 하나님“ 이라고 소개했을까?
이는 아브람의 당시의 영적인 상태와 관련이 있습니다. 창세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두 가지 사실에 대해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아브람은 두 번에 걸쳐 고개를 숙입니다.
“아브람이 얼굴을 대고 엎드리니라. [하나님]께서 또 그와 이야기하며 이르시되,”(3절)
“그때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세인 사라가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17절)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에 두 번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첫 번째는 면목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책망에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의 상태를 아시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람의 이 두 가지 불신에 대해 도와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첫 번째 불신을 어떻게 도와 주셨는가?
“나로 말하건대, 보라, 내 언약이 네게 있으니 너는 많은 민족들의 조상이 될지니라.”(4절)
아브람의 첫 번째 불신은 ‘언약’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창세기 15장에서 아브람과 언약하셨습니다.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오르는 등불이 그 조각들 사이로 지나가니라.”(창세기 15:17) 아브람은 하나님께서 친히 이 언약을 이루실 것을 보았습니다. 아브람의 조건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어기시면 제물들과 같이 둘로 쪼개지는 벌을 받겠다고 아브람에게 언약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17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다시 한 번 언약을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언약을 상기시켜 주셨습니다. 창세기 15장과 17장 사이에는 16장의 이스마엘의 탄생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탄생할 때 아브람의 나이가 팔십 육세였습니다(창세기 16:16). 그리고 17장 1절에서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찾아오신 때는 그의 나이 구십 구세였습니다. 이 13년 동안 아브람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 대해 잊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실 것에 대해 회의가 들었을 수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언약’에 대해 상기시켜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3절에서 그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하나님 앞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였습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람은 어떻게 도와 주십니까?
첫째,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이제부터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많은 민족들의 조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니라.”(5절)
‘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의 의미는, ‘높임을 받는 아버지’, ‘exalted father’입니다. 아브람은 부족장이었습니다. 대략 천 명에서 이천 명 정도의 사람들을 통치하였을 것입니다. 자급자족과 자기 방어를 위해서는 그 정도가 적당하였을 것입니다. 더 많아도 이동이 힘들고, 더 작으면 공격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람은 그 부족에서 높임을 받는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의미는 모든 나라의 아버지입니다.
둘째, 몸에 증표를 새기게 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포피의 살을 베어 내라. 그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맺는 언약의 증표가 되리라.”(11절)
“너희 대대로 모든 사내아이는 집에서 태어난 자든지 또는 네 씨에서 난 자가 아니라 타국인에게서 돈으로 산 자든지 난 지 여드레가 되면 너희 가운데서 할례를 받을지니라.”(12절)
하나님은 아브람과 그와 함께 한 자들에게 몸에 언약의 증표를 새기게 하셨습니다. 할례를 통해 늘 하나님과의 언약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도와 주셨습니다.
왜 이 언약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한가?
하나님은 창세기 12장 3절에서 그를 통해 땅의 모든 가족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씨를 통해 이 언약을 이루어 가실 것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아마도 아브람은 이스말엘이 태어나고부터 생각이 작아지고 제한되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이는 내가 그를 알기 때문이라. 그가 자기 자녀들과 자기 뒤에 있을 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명령할 터인즉 그들이 {주}의 길을 지켜 정의와 공의를 행하리니 이로써 {주}가 아브라함에 관하여 말한 것을 친히 그에게 이루리라, 하시고”(창세기 18:19)
아브람은 언약을 계승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 자손들에게 계속해서 언약에 대해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언약의 출발은 아브라함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시작이 잘못되거나 희미해지거나 왜곡되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보다도 완전하고 철저하게 이해해서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찾아오셔서 먼저 그의 이름을 바꾸어 주셔서, 늘 그의 이름이 불릴 때마다 이 언약을 상기케 하셨습니다. 그의 몸의 증표를 보면서 확고하게 이 언약를 붙들고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두 번째 불신을 어떻게 도와 주셨는가?
“[하나님]께서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내 사래로 말하건대 너는 그녀의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라. 그녀의 이름이 사라가 되리라.”(15절)
하나님은 아브람뿐만 아니라 사래의 이름도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래“는 ’나의 왕후’, ‘my pricncess’입니다. 사라는 ‘princess’입니다. ‘my’가 빠졌습니다. 사라는 더 이상 ‘아브라함’만의 왕후가 아닙니다. 아브람은 부족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부족에서 왕과 같은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그 부족을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또한 여러 문제들에 재판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래 역식, 그 부족에서 ‘왕후’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사래의 몸에서 약속의 자녀가 태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이에 대한 아브람의 반응이 어떠합니까?
“그때에 아브라함이 얼굴을 대고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인 사람에게 아이가 태어날 수 있으리요? 구십 세인 사라가 낳을 수 있으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아뢰되,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하매”(17-18)
아브람은 두 번째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웃었습니다. 자신의 현실을 바라볼 때, 도저히 실현 가능성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와 사라의 나이를 볼 때, 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마엘로 만족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불신하는 아브라함을 어떻게 도와주십니까?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참으로 네 아내 사라가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의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또 그의 뒤를 이을 그의 씨와 더불어 내 언약을 세워 영존하는 언약이 되게 하리라.”(창세기 17:19)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이름을 “이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예 태어날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신 것입니다. ‘이삭“이라는 의미는 ’웃게 하다‘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라에게서 아들을 얻게 하시므로, 아브라함과 사라가 웃게 하실 것을 분명하게 약속해 주셨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불신을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까?
창세기 21장에 ‘이삭’이 태어납니다. 하나님의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곳에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어떤 능력 있는 일도 행하실 수 없어서 다만 몇몇 병든 자에게 안수하여 그들을 고치실 뿐이었으며”(마가복음 6:5)
예수님은 고향 나사렛에서 배척 받으셨습니다. 고향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요, 그의 형제들을 다 알고 있는데, 어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가“ 하며 예수님에 대해 불신하였습니다. 그리할 대, 예수님은 그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인 능력을 나타내실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자식을 주기 위해서는 먼저 두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했습니다. 그들이 불신을 회개하고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들은 믿음의 모델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불신의 회개하도록 도와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회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말씀하신 대로 바로 그 날 자기 아들 이스마엘과 자기 집에서 태어난 모든 자와 자기 돈으로 산 모든 자 곧 아브라함의 집 사람들 중에서 모든 남자를 데려다가 그들의 포피의 살을 베어 냈더라.”(23절)
“바로 그 날”이라는 단어에서 아브라함이 자신의 불신을 회개하였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적극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아는 만큼 행동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불신을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회개의 표로써, 자신의 삶의 돌이킬 줄 아는 자였습니다. 아브라함은 행동을 통해 자신의 회개와 믿음을 표시하였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자
하나님은 현실에 매여 믿음의 눈으로 언약을 이루어 가실 전능한 하나님을 믿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아브라함에게 13년 동안 침묵하셨습니다.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니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17:1)
“walk with God” vs “walk before God”의 차이
“walk with God”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묻고 답하고, 기쁨을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함께 걸어가는 모습은 동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에녹이 함께 동행 하는 것을 “walk with God”로 표현합니다. 반대로 “walk before God”은 왕이나 재판관 앞에 선 모습을 연상시킵니다.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왕이나 재판관 앞에 있는 모습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walk before God” 라고 명하십니다. 그 때에 우리가 겸손히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완전하다'의 의미
‘완전하다“는 ”blameless“입니다. 비난할 것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브라함에게는 비난 받아야 할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불신이며,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불신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을 ”전능한 하나님“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언약 백성,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약속하신 것을 능력으로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임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지적하실 때, 회개하는 것이 참 된 겸손입니다. 아브라함은 우리와 같이 연약하여 실수하였지만 하나님의 지적을 받을 때마다 돌이키고 회개하였습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완전해야겠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겸손히 회개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의 문제 앞에 아브라함과 같이 살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13년이었다면 우리에게는 그 시간이 더 길수도 있고, 더 짧을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가만 두시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그의 연약함을 감당해주시고 믿음의 사람으로 키워 가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창세기 17장에서 만났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의 현실 문제 앞에 믿음을 잃고 방황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을 도와주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름을 바꾸어 주시고, 할례를 통해 몸에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이삭’이라는 이름도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다양한 방식으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첫째로, 말씀을 통해 우리의 낙심한 마음을 강하게 하실 것입니다. 둘째로, 실제 우리의 삶에서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냐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신 사명을 각성하고, 살아가는 자를 하나님은 분명하게 도와주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불신에 빠져 낙심하고, 세상에 타협하며 살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과 같이 즉각적인 회개와 돌이킴의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감당해주시고 믿음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시는 전능한 하나님을 바라보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