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
지난 시간 우리는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우는 바울에 대해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에 그리스인 디도를 데리고 갔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외 다른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안디옥에서 베드로를 책망하였습니다. 그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복음을 선포하면서, 율법을 지키고자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의 기둥 같은 자였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에 심지어 그와 같이 수고한 바나바 같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나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바울은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그 대상이 설령 사도 베드로로 할 지라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오늘 말씀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난 갈라디아 성도들을 책망하는 말씀입니다. 경험보다 더 강한 가르침은 없습니다. 경험했다는 사실이 우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다른 사람들이 그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습니다. 내가 경험했는데 그 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오늘 바울은 그런 개인적인 체험에도 불구하고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다른 길로 가고 있는 갈리디아 성도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저의 말씀의 제목은
누가 너희를 꾀어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가운데서 너희 눈앞에 분명하게 제시되었거늘 누가 너희를 꾀어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1절)
1. 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어리석도다”란 의미는 “바보”라는 의미입니다. “멍청이”라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말들을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의아합니다. 그만큼 사도 바울이 극도로 화가 나있다는 사실을 반증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행동에 대해서도 이정도로 책망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기독교의 가장 기초를 이루는 교리 문제가 걸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무너지면 기독교가 무너집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이유로 강력하게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제시되었거늘”
제시 되었다는 그리스어 단어는 ‘앞’을 의미하는 ‘프로’와 ‘쓰다’를 의미하는 ‘그라포’의 합성어입니다. 그러므로 “제시되었다”란 의미는 어떤 초자연적인 사실로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전해진 것이 아니라 문서의 형태로 가르쳐지고 전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말씀으로 가르쳤습니다. 당시에는 성경이 완성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을 통해, 또 그가 받은 계시를 기록하여 가르쳤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3. “누가 너희를 꾀어“
“꾀어”라는 단어는 신약 성경에서 이곳에 단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는 ‘악한 마법에 걸린’, ‘악한 주술에 걸린’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가 악한 마법에 걸렸느냐?”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말을 우리 정서에 가깝게 번역하자면, “귀신에 홀렸냐?”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이 무엇에 홀리지 않고는 이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의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4. “너희가 진리에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순종”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설득 당하다”란 의미입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설득을 당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을 설득한 자들은 아마도 유대인 거짓 교사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의 사도권를 부정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께 직접 가르침을 받지 않는 자라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사도권을 약화시킨 후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유대교의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을 이를 “다른 복음”이라고 칭하였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순진하게도 그들에게 설득을 당하였습니다. 바울이 볼 때, 이런 사실이 너무도 답답했습니다. 그래서 앞에서 배운 대로 “어리석도다”, “누가 너희를 꾀어”란 아주 강한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고자 하노라. 너희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았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받았느냐?(2절)
이 세상에 자신의 경험보다 더 강력한 증거는 없습니다. 백 명, 천 명, 만 명,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와도 자신이 확실하게 경험한 사실을 설득해서 다른 길로 가게 하기는 정말 어렸습니다. 그 만큼 경험은 강력한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깨우치기 위해 먼저 그들의 경험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율법의 행위로 성령을 받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것은 복음을 가르쳤습니다. 그리할 때, 그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죄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죄인들을 위해 오셨음을 알 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죄가 사하여지고, 그들이 영생을 얻게 되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영생을 얻은 증거, 구원 받은 증거는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은 보증이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자라는 증거다 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은 이런 확실한 내적 증거가 있었습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이 성령을 율법을 행함으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들음으로 받았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어리석으냐? 너희가 /성령] 안에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완전해지고자 하느냐?(3절)
“완전”이라는 단어는 “목적하다”, “최종 결과에 도달하다”란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묻습니다. “너희가 믿음으로 구원받아 성령으로 인침을 당했거늘 이제 너희의 구원의 완성을 율법으로 하려고 하느냐?” 갈라디아 성도들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면 끝까지 믿음을 붙들고 가야 합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구원의 완성을 이루려는 사실에 너무 화가 났습니다. “이 바보들아”, “이 멍청이들아” 사도 바울은 다시 한 번 강하게 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토록 많은 것들로 헛되이 고난을 당하였느냐, 과연 그 일이 헛되냐?(4절)
갈라디아 성도들은 다른 지역의 성도들처럼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고난을 당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아고 섬기는 것이 시기가 났습니다. 이방인 성도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 인한 구원의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들이 받는 고난을 기쁨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묻습니다. “과거 너희들이 복음 때문에 받은 고난이 헛되냐? 정말 아무 것도 아니냐?”
그런즉 너희에게 /성령]을 제공해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기적들을 행하시는 그분께서 그것을 율법의 행위로 하시느냐, 믿음에 관하여 들음으로 하시느냐?(5절)
“그런즉”은 “그러므로”입니다. 앞에 대한 원인에 대한 결과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그들이 믿음으로 복음을 영접했을 때, 그들이 구원 받은 증거로서 성령이 임하였음을 상기시켰습니다. 율법에 대해 알기 이전에 이미 그들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또한 그 일로 인해 다른 지역의 성도들처럼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았습니다. 이런 경험들을 잘 생각해 보고,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들음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는지 잘 생각해 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공로를 했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복음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은 것이 아니라 믿어져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습니다. 복음 외에 다른 것은 필요가 없습니다.
적용과 결론
오늘 이 시대에 우리를 꾀는 자가 있습니다. 계속해서 우리를 설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 받기 위해 어떤 행위를 강조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천주교입니다. 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복음 외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들의 주장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유대교 거짓 교사들의 주장과 같습니다. 또한 개신교 내에 우리의 구원이 행위에 기초에 취소될 수 있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선한 열매를 맺으면 구원이 지속되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이 취소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들은 이러한 교리로 성도들을 위협하고 협박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선하게 봐서, 오늘날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선한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의 지탄 받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도, 이런 가르침은 틀린 것입니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성화’ 교리를 찬찬히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오직 은혜로 구원 받는다는 ‘칭의’ 교리에 바로 서 있어야 함을 배웠습니다. 사도 바울의 “이 바보야”, “이 멍청이야” 라는 너무도 강력한 권면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이 율법의 행위로부터가 아니라 듣고 믿음으로 그에 대한 보증으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였음을 알고 우리의 구원의 경험적인 증거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