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부녀여 —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by 박정일 posted May 13,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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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요한이서7~13
성경본문내용 7.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
8. 너희는 스스로 삼가 우리가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받으라
9.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그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11.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라
12. 내가 너희에게 쓸 것이 많으나 종이와 먹으로 쓰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너희에게 가서 대면하여 말하려 하니 이는 너희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13. 택하심을 받은 네 자매의 자녀들이 네게 문안하느니라
강설날짜 2026-05-13

부녀여 —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처럼 보이는 것이 있다

1세기 교회에는 순회 교사들이 있었다. 이 공동체 저 공동체를 돌아다니며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이었다. 부녀는 그들을 받아들이고 섬기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고 한다. 순회 교사를 환대하는 것이 부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사랑이 넘치는 부녀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데 요한이 말한다. 받아들이지 말라.

왜인가. 바로 앞 6절에서 요한은 진리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7절에서 곧바로 이유를 밝힌다.

왜냐하면 — 미혹하는 자들이 이미 세상에 나왔기 때문이다.

진리 안에서 행하라는 권면이 추상적 교훈이 아니다. 지금 당장의 위협 앞에서 주어진 말이다.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Ⅰ. 적그리스도의 정체를 알라 (7절)

"미혹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것이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 (7절)


요한이 경고한다. 미혹하는 자들이 많이 나왔다. 하나가 아니다. 이미 많이 — 지금 이미 세상에 있다.

그렇다면 적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요한은 명시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고백하지 않는 자다.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 — 그가 바로 적그리스도다.

적그리스도는 종말에 나타날 특정한 한 인물이 아니다. 지금 이미 활동하고 있는 자다. 부녀의 집 문을 두드리는 순회 교사 중 하나일 수 있다.

원문 깊이 보기

ἐρχόμενον ἐν σαρκί — 현재분사다. 오신 이 아니라 오시는 이다. 성육신은 과거 사건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유효한 실재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육체로 오신 분으로 고백되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이 부인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οὗτός ἐστιν ὁ ἀντίχριστος — 관사가 붙어 있다. ὁ ἀντίχριστος —  적그리스도. 막연한 적그리스도가 아니다. 바로 이것 — 성육신을 부인하는 자가 적그리스도임을 명시한다.


생각해 볼 질문: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지금도 살아있는 실재로 고백하는가. 아니면 지나간 역사적 사건으로만 아는가.


Ⅱ. 너희 자신을 살피라 (8절)

"너희는 너희를 삼가 우리의 일한 것을 잃지 말고 오직 온전한 상을 얻으라" (8절)


7절에서 경고했다. 8절에서 요한은 그 경고에 대한 행동을 요구한다.

너희 자신을 살피라.

그런데 무엇을 살피는가. 거짓 교사를 살피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을 먼저 살피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이 우리 라고 말한다. 장로가 부녀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함께 같은 자리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가 수고한 것들이 있다. 부녀가 지금까지 진리 안에서 걸어온 그 삶이다. 요한과 함께 쌓아온 것들이다.

거짓 교사를 받아들이는 순간 그 삶이 한순간에 무너진다.

왜인가. 진리 없는 자를 받아들이는 것이 진리 안에서 걸어온 삶을 배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를 지키는 것은 무언가를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걸어온 그 삶을 지키는 것이다.


생각해 볼 질문: 나는 거짓 교사를 분별하려 하는가. 아니면 먼저 나 자신을 살피고 있는가. 지금까지 진리 안에서 걸어온 나의 삶이 있는가.


Ⅲ.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라 (9절)

"지나쳐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거하지 아니하는 자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하되 교훈 안에 거하는 이 사람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시느니라" (9절)


9절에 중요한 역설이 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더 진보된 가르침을 가졌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더 깊은 영적 지식. 더 높은 계시.

요한은 그것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앞서 나아가는 것이 진보가 아니다. 이탈이다.

오늘날도 동일하다. "이제 우리는 더 깊이 알았다" "시대가 바뀌었다" "그 교훈은 낡은 것이다"

요한은 말한다. 그것이 이탈이다. 처음부터 있던 것 안에 머무는 것이 진짜 진보다.

그리고 선언한다.

그리스도의 교훈 밖에 있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없는 것이다.

진리 없는 사랑이 단순히 잘못된 사랑이 아니라 하나님 없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교훈 안에 거하는 자는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모신다.

원문 깊이 보기

προάγων과 μένων의 대조. προάγων — 앞서 나아가는 자 — 현재분사 μένων — 거하는 자 — 현재분사

둘 다 현재분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앞서 나아가고 있는 자와 머물고 있는 자가 있다.

세상은 προάγων을 진보라 부른다. 요한은 μένων을 진보라 부른다.

θεὸν οὐκ ἔχει — ἔχει — 소유하다, 모시다. 단순한 지식이 아니다. 관계의 문제다. 그리스도의 교훈 밖에 있는 자는 하나님과의 관계 자체가 없다.


생각해 볼 질문: 나는 그리스도의 교훈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고 있는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가 처음부터 있던 것을 잃고 있지는 않은가.


Ⅳ. 집에 들이지 말라 (10–11절)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말라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 악한 일에 참여하는 자임이니라" (10–11절)


요한이 구체적으로 말한다.

누구든지 오거든 — 그런데 조건이 있다. 모든 순회 교사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을 가져오지 않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집에 들이지 말라. 1세기 교회는 가정 교회였다. 집에 들인다는 것은 단순히 문을 여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강단을 허락하는 것이다.

인사도 하지 말라. 당시 인사는 단순한 안부가 아니었다. 그를 정당한 교사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인사하는 자는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자다. 교제는 중립이 아니다. 누구와 교제하느냐가 그 교제의 성격을 결정한다.

부녀의 환대가 사랑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이 말하는 것은 이것이다. 진리 없는 자를 향한 환대는 사랑이 아니라 악한 일에 동참이다.


생각해 볼 질문: 나는 관용과 동참을 구별하는가. 선한 의도가 악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적용 — 이것은 오늘의 이야기다

20세기 — 자유주의 신학

19–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다. 스스로는 더 진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핵심 주장은 이것이었다.

첫째 —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의 종교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둘째 — 성육신은 신화다.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것은 문자적 사실이 아니다.

셋째 — 부활은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실존적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넷째 — 예수는 신이 아니라 도덕적 교사다. 기독교의 핵심은 교리가 아니라 윤리다.

다섯째 — 역사의 진보가 하나님 나라를 만든다. 인간의 이성과 도덕을 발전시키면 이 역사 안에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

προάγων — 앞서 나아갔다. 그러나 요한의 언어로 하면 — 이탈했다.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유럽의 주류 교단들이 텅 비었다. θεὸν οὐκ ἔχει — 하나님이 없는 교회가 됐다.


21세기 — 종교다원주의

오늘날 교회 안에서 같은 흐름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중 요한이서와 직접 연결되는 것이 있다. 종교다원주의다.

"모든 종교는 같은 하나님을 향한다" "예수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배타적이고 사랑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말한다.

τὸν πατέρα καὶ τὸν υἱὸν ἔχει 아버지와 아들을 함께 모신다

아들을 통하지 않고 아버지께 갈 수 있다는 주장은 그리스도의 교훈을 정면으로 벗어나는 것이다.

사랑처럼 보인다. 관용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이서의 언어로 하면 — 진리 없는 사랑이다.


그들과 교제해야 하는가

요한이서 10–11절의 원칙으로 답한다.

조건이 있다. 모든 사람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이 교훈을 가져오지 않는 자에게만 해당된다.

그 교훈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그리스도의 교훈의 절대성. 그분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것.

이것을 부인하는 자를 공동체 안으로 받아들이지 말라. 강단을 허락하지 말라. 그를 정당한 교사로 인정하지 말라.

그러나 — 개인적 관계를 모두 끊으라는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교사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들을 향한 사랑은 계속된다. 그러나 그 사랑은 진리 안에서여야 한다. 진리를 타협하며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론 — 부녀여,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요한은 부녀에게 사랑하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진리 안에서 사랑하라고 한다.

거짓 교사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처럼 보인다. 관용처럼 보인다. 환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이 보여주는 것은 이것이다.

진리 없는 자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악한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리 안에서 걸어온 그 삶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하나님 없는 자와 교제하는 것이다.

20세기 교회가 그 자리에 있었다. 진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버렸다. 사랑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진리를 타협했다. 그 결과 — 하나님이 없는 교회가 됐다.

오늘날 교회도 같은 압력 앞에 서 있다.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할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버리고 사랑할 것인가.

부녀에게 주어진 이 말이 오늘 당신에게 — 그리고 오늘 교회에게 — 주어진 말이다.

부녀여 — 진리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진리 안에서 사랑하라.


마지막 질문: 지금 내 삶에서 진리를 기준으로 분별해야 할 관계가 있는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진리와 사랑 사이의 긴장을 나는 어떻게 붙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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