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일서5장] 떠난 형제, 남겨진 기도

by 박정일 posted Apr 28,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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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박정일
성경본문 요한일서5:13~17
성경본문내용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
14. 그분 안에서 우리가 가진 확신이 이것이니 곧 우리가 그분의 뜻대로 무엇이든 구하면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신다는 것이라.
15.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우리 말을 들으시는 줄 우리가 안즉 또한 우리가 그분께 구하여 청원한 것들을 얻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
16.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짓는 것을 보거든 그는 간구할 것이요, 그러면 그분께서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아니하는 자들로 인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나는 그가 그것으로 인해 기도하라고 말하지 아니하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느니라.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느니라.
강설날짜 2026-04-28
 

도입

혹시 이런 경험이 있습니까?

한때 우리와 함께 예배하던 사람이
어느 날 믿음에서 멀어지고,
교회를 비난하며,
다른 가르침을 붙들고 떠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낯선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찬송하던 사람입니다.
같이 기도하던 사람입니다.

어쩌면
가장 가까운 가족일 수도 있습니다.
친형제일 수도 있고,
남편이나 아내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떠나는 것은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아픔이고,
남겨진 사람에게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상처입니다.

초대교회도 바로 그런 아픔을 겪고 있었습니다.

요한일서가 기록될 당시,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를 왜곡하고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도들은 흔들렸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맞는가.
정말 우리에게 영생이 있는가.

이런 상황 속에서
요한은 성도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판단보다 먼저 무릎을 꿇으라고 말합니다.

떠난 사람을 향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분명히 보여줍니다.

 

1. 담대함의 근거 — 그가 들으신다 (14절)

에베소 근교의 어느 가정교회, 주후 90년대 초입니다.

집은 작습니다.
열다섯 명 남짓이 모이면 꽉 찹니다.
포도주 상인 크리스포스의 집입니다.

오늘 모임은 무겁습니다.

석 달 전, 이 공동체에서 한 형제가 떠났습니다.

그는 한때 가장 열심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을 잘 알았고,
기도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말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 같은 분이 결코 더러운 육체의 몸으로 오실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나중에는 대놓고 말했습니다.

몇 사람이 그를 따라 나갔습니다.

공동체에 남은 사람들은 흔들렸습니다.

그가 틀렸다고 확신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불안이 남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이 맞는가.
우리에게 정말 영생이 있는가.

그때 요한의 편지가 왔습니다.

크리스포스가 편지를 읽습니다.

낭독자의 목소리가 작은 방을 채웁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13절에서 먼저 확신을 선언합니다.

너희에게는 이미 영생이 있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른 믿음 안에 거하게 하려고
이 편지를 썼다고 말합니다.

이어 요한은 14절부터 기도의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παρρησία. 담대함.

이 단어가 방 안에 떨어집니다.

그 형제가 떠난 후
이 공동체에서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기도에 대한 확신을 잃었습니다.

확신을 잃으면
기도가 먼저 죽습니다.

παρρησία는 본래
헬라 시민이 광장에서
아무 눈치 없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발언의 자유를 뜻했습니다.

요한은 그 단어를 기도에 사용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그런 자유가 있다는 것입니다.

숨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물러서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담대함은 기도의 결과가 아닙니다.

담대함이 있어야
기도가 시작됩니다.

확신이 생겨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들으시는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담대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조건이 하나 붙습니다.

κατὰ τὸ θέλημα αὐτοῦ — 그의 뜻을 따라.

여기서 오해하기 쉽습니다.

이 조건은 담대함을 제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담대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요한은 서신 안에서 이미 말했습니다.

2:17 —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3:23 —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아들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
5:11 —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셨고 이 생명이 그 아들 안에 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뜻은
세 가지로 모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것,
형제를 사랑하는 것,
영생 안에 거하는 것.

이것은 추상적인 계획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분명하게 계시된 것입니다.

질문이 생깁니다.

그렇다면 건강, 직장, 가정의 문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요한이 그런 기도를 금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요한의 강조는 여기에 있습니다.

형제의 회복,
믿음의 지속,
사랑의 실천을 위한 기도는
이미 하나님의 뜻 안에 있으므로
거절당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말합니다.

ἀκούει ἡμῶν — 그가 들으신다.

현재형입니다.

지금도,
언제나.

그 현재형이
기도하는 사람의 발판입니다.

요한은 말합니다.

형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2. 담대함의 논리 — 구한 것은 이미 그의 손 안에 있다 (15절)

낭독이 계속됩니다.

“그가 우리 말을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바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노인 하나가 고개를 듭니다.

미리암이라는 여인입니다.

오십 대 중반,
이 공동체에서 가장 오래 믿은 사람입니다.

그녀의 아들이
그 떠난 형제를 따라 나갔습니다.

석 달 동안
그녀는 매일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무슨 소용인가.
하나님이 들으시는가.
내 기도가 닿기는 하는가.

요한의 말이 귀에 꽂힙니다.

οἴδαμεν ὅτι ἀκούει — 들으심을 안다
οἴδαμεν ὅτι ἔχομεν — 가졌음을 안다

οἴδαμεν이 두 번 나옵니다.

앎이 앎을 낳습니다.

들으심을 아는 것이
가졌음을 아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이 “안다”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직관적인 앎입니다.
의심 없는 앎입니다.

혹시 그러시겠지,
아마 들으시겠지,
그런 수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요한의 신앙은
느낌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분명한 앎 위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들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으신다는 것을 압니다.

응답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을 압니다.

여기서 시제가 중요합니다.

ᾐτήκαμεν — 완료형입니다.

구하는 행위는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ἔχομεν — 현재형입니다.

그 응답은
지금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미리암이 무릎을 꿇은 그 순간,
아들의 이름은 이미
하나님의 손 안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기다리는 것은
응답 여부가 아닙니다.

이미 결정된 것의 나타남입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의 응답을
반드시 보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이미 받으셨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통제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들으셨다는 사실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압니까.

느낌으로 알지 않습니다.
경험으로 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담대하게 구하라 하셨기 때문에 압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압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가장 선한 방식으로
응답하실 것을 알기 때문에 압니다.

이 세 가지 위에서
οἴδαμεν이 성립합니다.

미리암의 눈에
눈물이 고입니다.

소리 없이.

 

3. 담대함의 귀결 — 떠난 형제를 위해 무릎을 꿇는다 (16–17절)

낭독이 16절로 넘어갑니다.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저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방 안이 조용합니다.

ἴδῃ.

어느 날,
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봅니다.

오랫동안 함께 예배드렸던 사람입니다.
같은 성찬상에 앉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교회를 떠났습니다.

혹은 떠나는 중입니다.
혹은 아직 자리에 있지만
이미 마음이 떠난 것이 보입니다.

요한은 그 순간을 알고 있었습니다.

언젠가 반드시 오는 순간,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순간입니다.

모두가 같은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를 따라 나간 사람들.

그 중에는
가족이 있고,
친구가 있습니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묻습니다.

“그 사람은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한 것입니까?”

침묵입니다.

보통 우리는
그 자리에 판단을 놓습니다.

왜 저렇게 되었는지.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인지.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경계선 앞에서
오래 서 있습니다.

그러나 서 있는 동안
무릎은 꿇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자마자 판단합니다.

요한은
보자마자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ἴδῃ — 보거든
αἰτήσει — 구하라

중간이 없습니다.

보았으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죄의 종류를 분석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죄 가운데 있는 형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합니다.

크리스포스가 천천히 말합니다.

“요한 장로님은
그 경계를 우리에게 맡기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이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구하라고.”

요한은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습니다.

누가 용서받을 수 없는지는
하나님만 아십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맡긴 것은
그 판단이 아닙니다.

돌아오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우리의 일은 단순합니다.

우리 곁을 떠난 모든 자를 위해
구하는 것입니다.

미리암이 고개를 끄덕입니다.

그녀는
아들이 돌아올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은 압니다.

구하는 것입니다.

담대히.

그날 저녁
기도 모임은 길었습니다.

떠난 사람들의 이름이
하나씩 불렸습니다.

마르코스.
레아.
드로비모.

이름을 부를 때마다
누군가 그 이름을 붙들었습니다.

παρρησία는
그날 밤 그 작은 방에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흔들리는 사람들이,
흔들리는 목소리로,
떠난 형제들의 이름을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

 

결론

도입에서 떠올린
그 얼굴로 다시 돌아갑니다.

한때 함께 예배했고,
함께 찬송했고,
같이 기도하던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잘못된 가르침을 붙들고
믿음에서 멀어져 떠나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그를 위해 기도할 자신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까.

정말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그러나 요한은 말합니다.

그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를 용서하실지, 용서하지 않으실지는
오직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가 끝까지 떠날 사람인지,
잠시 미혹 가운데 있다가 돌아올 사람인지도
하나님만 아십니다.

그 판단은
우리의 자리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뜻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하게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이 돌아오든 돌아오지 않든
결과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일은
결과를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을 불러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마지막을 판단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름을 올려드리는 사람입니다.

떠난 형제를 향해
정죄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의 뜻대로 구할 때
하나님은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다면
낙심보다 먼저 기도하십시오.

판단보다 먼저
담대히 구하십시오.

잘못된 가르침으로 떠난 자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담대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가장 선하시고
가장 정확히 아시는
하나님의 손에 맡기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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