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지긋하신 성도님들이 한참 어린 목회자들을 목사님, 강도사님, 전도사님이라 깍뜻이 존칭을 붙입니다. 이는 한국 교회의 목회자를 대하는 아름다운 전통인 것 같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에 아무런 문제 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문득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주님 안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교회 내의 직위는 하나님께서 필요해 주신 것이지, 그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계급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저를 ~님이란 호칭을 사용한다면, 저도 그 분들을 이전보다 더 깍뜻이 성도님이라고 존칭을 사용해 예우해 드려야 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존칭을 생략하고, 교회 내에서 어떤 계급적인 인상을 줄 호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봅니다. 우리 주님 안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을 내가 먼저 인식하고 실천해 가야 함을 이 아침에 생각했습니다. 이런 저의 생각에 부합하는 좋은 글이 없나 찾는 중에 좋은 글이 있어 올리니 함께 읽고 생각하고 공감하면 좋겠습니다.
주일 예배 대표 기도 시간. 예배 후 친교를 위해 여선교회가 특별히 점심을 준비했다. 여선교회의 일원이기도 한 담임목사 부인이 명랑한 목소리로 식사하는 신도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끝자리에서 먹는 데에만 집중하던 고집사, 맞닥뜨린 담임목사 부인과 대화를 이어가는데 말끝마다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는데 영 귀에 거슬린다. 마침 고 집사 부인의 안부를 묻는 그녀에게, “우리 부인께서는요, 너무 바쁘셔서요(하략)”라고 비아냥거리며, 시도 때도 없이 ‘우리 목사님, 우리 목사님’하는 담임목사 부인을 걸고 넘어진다. 하여튼 고 집사에겐 그냥 지나가는 것이 없다. 예이, 까다로운 고집통 집사야! 우리는 정말 존칭(尊稱) 아니 과칭(過稱)에 묻혀 산다. 대통령이면 족한 호칭을 대통령님 각하라고, 국회의원이면 족한 호칭을 국회의원님이라고, 의사면 족한 호칭을 의사선생님이라고, 선생이면 족할 호칭을 선생님이라고 붙여 존칭에 존칭을 더한다. 1900년대 초의 간호부가 간호원이 되었다가 간호사가 되고 최근에는 급기야 간호사 선생님이 된 것처럼 이대로 가다가 조금 뒤면 자식님, 마누라님이라고 부를 날이 머지 않았다. 호칭은 직업과 직급의 표징이다. 하는 일에 대한 축약적인 표현이 호칭이요, 다양한 직급에 대한 편리적, 경제적 분류가 호칭일 뿐이다. 의술을 전하니 의사요, 변호를 하니 변호사일 뿐이다. 회사를 대표하니 사장이요, 목회를 하니 목사요, 나라를 대표하니 대통령일 뿐이다. 크리스천의 인간관계는 적절한 호칭에 있다. ‘과공(過恭)이 비례(非禮)’이듯이 ‘과칭도 비례’다. 더도 덜도 아닌 적절한 호칭과 존칭이 우리의 인격을 반영한다. 스스로 높임을 받으실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며 그 외 우리 인간들은 근본적으로 동등하고 평등하다. 예수님조차 우리의 친구라고 하셨지 않은가? 전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으실 이는 오직 하나님 한 분이기에 그 외에는 상대방에 대한 직업과 직급에 대해서만 구분지어 존경할 필요가 있다. 구분된 존경은 구분된 호칭에서 시작된다. 존경이 구분되지 않고 자칫 잘못 사용되면 추앙으로 비화되고, 추앙은 경직과 권위의 문화를 잉태한다는 것을 우리는 고래로 목격해 왔다. 믿음으로 세상사람과 구분되었다고 말로만 자위하지 말고, 적절한 호칭으로도 구분되는 노력을 하자. 캐나다에 정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캐나다 교회의 행사에 초대 받아 갔다. 귀신들의 축제인 할로윈데이 대신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다고 해서 시험 삼아 간 것이다. 아이들은 캐나다 교인들이 정성 들여 준비한 각종 프로그램에 빠져 있고, 동반한 부모들은 군데군데 둘러서서 대화를 나누는데, 멀리서 보고 있던 하얀 머리칼의 서양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캐나다 중부 내륙지방인 위니펙이라는 도시에 살다가 이곳 밴쿠버에 온지 칠, 팔 년 정도 됐다는 폴이라는 중년의 그 남자는, 추운 고장인 위니펙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주위사람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교회에서 만난 그 재미있는 서양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 놓는데 아내가 박장대소한다. 조금 뒤 아내는 나에게 그 사람은 신도가 아니라 그 교회 담임목사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는 왜 나에게 목사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을까? 호칭과 직급의 구분은 기독교의 미주보다 유교의 극동아시아에서 더 보편화됐다. 실용주의의 미주가 수평과 평등을 강조하는 반면, 명분의 아시아에서는 수직과 권위를 선호한다. 개인주의의 미주보다 집단주의의 아시아에서 호칭은 더 엄격하게 지켜진다. 집단주의의 사회에서는 개별적인 인격의 주체로서의 이름보다는 그 사람이 속한 집단에서의 위치가 더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일전에 일본의 어느 대기업에서는 호칭이 권위를 부추겨 위화감을 형성한다고 직급에 대한 호칭을 일절 생략하겠다고 선언했다. 이름에 “…상”만 붙이겠다는 것이다. 권위를 상징하는 호칭을 배격하고 이름을 불러 수평적인 조직문화를 만들겠다는 가상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교회에서는 좋은 게 다 좋은 거라고 존칭을 남발하지 말자. 정말 존칭을 사용하려면 그 호칭에 맞게 그 사람의 인격도 존중하라! 그리고 최소한 자신을 스스로 높이는 우를 범해 하나님의 빛을 가리지 말자. 목사는 회중이 있을 때에만 목사라고 부르자. 한번 목사는 영원한 목사가 아니다(이건 해병대에나 어울리는 말이다-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장로나 집사도 마찬가지다. 회중이 있고 그 회중이 요청했을 때에만 직분은 유효하다. 그러면 뭐라 부르냐고? 성경에 나온 대로만 부르면 된다. 우리는 모두 주님 안에서 형제, 자매이고 이처럼 아름답고 영원한 호칭은 없다. 호칭이 평등해질 때 잘못된 권위가 사라진다. “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잠 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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